GCC/GU/사우디2019.09.24 11:48

(올해 MBC 채널의 라마단 드라마 "알아수프 (변화의 바람)"를 통해 40년만에 그랜드 모스크 점거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가운데 인물이 드라마 속 주하이만 알오타이비)



1.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의 역린: 종교 국가 종주국? 신정 국가 종주국?

사우디 현대사에는 해리포터의 숙적 볼드모트처럼 2019년 MBC 방송의 라마단 특집 드라마 "알아수프"를 통해 다뤄지기 전까지 40년 동안 사우디 사회 내에서 공개적으로는 "이름을 불러서는 안되는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1979년 11월 20일 (히즈라력 1400년 1월 1일)부터 2주간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을 일으였던 주하이만 알오타이비가 그 주인공입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을 통해 이란이 시아파 종교 국가에서 이슬람권 유일의 신정 국가로 탈바꿈한지 몇 달 안되어 일어난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은 사우디가 이란의 영향력이 호르무즈 해협을 넘어 아라바아 반도 및 그 일대로 확산되는 것에 그야말로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이슬람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사우디가 이란처럼 종교 지도자 라흐바르가 국민투표로 선출되는 대통령 위에 있는 신정 국가가 아닌 사우드 씨족의 국왕이 최고 종교 지도자 그랜드 무프티 위에 있는 종교 국가이기 때문에 비롯되는 역린이기도 합니다.


사우디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의 지방 국가를 세웠던 18세기부터 힘은 있었지만 곳곳에 산재한 여러 씨족을 아우를 강한 사상적 기반이 필요했던 사우드 씨족과 극단주의를 내세워 타락해가던 세상을 정화하고 싶었지만 세력이 부족했던 알앗셰이크 씨족의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요새말로 끔찍한 혼종 국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정치적인 세속 정권과 누구보다 정치세력화되기 쉬운 극단주의자들의 결합은 사회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대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대립의 결과가 사회 자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이는 현대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건국한 국부 압둘 아지즈 국왕이 아라비아 반도 통일 전쟁 과정에서 든든한 우군이었던 극단주의자들의 민병대인 이크완이 개국공신임을 내세워 정치세력화를 시도하자 궤멸시켜 버린 후 잔존 세력을 친위대인 사우디 국가방위군 (SANG)으로 흡수해버렸던 것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역사] 사우디는 어떻게 건국되었을까? 사우드 씨족의 오랜 투쟁기,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참조) 


세계 대공황기에 건국된 땅덩어리만 큰 신생국가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의 미래는 석유 발굴 및 수출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수익원을 확보하게 된 사우드 씨족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역사] 사우디의 운명을 바꾼 75년전 오늘, 1939년 5월 1일 참조) 사우디는 점차 극단적인 교리에서 탈피해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유지되는 온건한 종교 국가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런 변화 속에 마냥 버릴 수 없었던 종교세력을 의식한 듯 압둘 아지즈 국왕은 1953년 서거 전 사우디 내 최고 권위의 종교 지도자를 상징하는 그랜드 무프티직을 신설했지만, 그나마도 1969년 초대 무프티 무함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앗셰이크가 사망한 1969년 이후 2대 무프티가 지명된 1993년까지 그랜드 무프티라는 직위 자체가 사라지는 굴욕을 겪게 됩니다.

(1970년대 사우디 방송)



2. 이란 이슬람 혁명, 그리고 마흐디 재림을 앞세운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 시아파 이란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사우디 사회가 온건한 종교 국가로 자리잡아가던 1979년 호메이니가 중심이 된 민중 쿠데타로 팔레비 샤 왕조가 무너지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재탄생한 것은 서구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온건한 종교 국가를 지향하던 타락한 사우드 씨족에게도, 사우드 씨족과의 혼종을 택했을 때의 초심을 잃고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사우디 정부에 제 목소리를 내지못하는 이슬람 성직자들에게도 반감을 갖고 있던 주하이만 알오타이비에게는 자신의 이상도 실현가능할 수 있다는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타락한 세상으로 인해 곧 닥치게 될 아포클립스에 대비하기 위한 신정 국가의 건설


나즈드 지역 유지의 일원이자 압둘 아지즈 국왕과 사우디 통일 전쟁의 주역이었다가 궤멸된 민병대 이크완의 핵심 멤버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후손이면서 자기 자신도 설교사이자, 사우디 정부 친위대 국가방위군에서 18년을 복무한 하사 출신, 그리고 훗날 사우디의 두번째 그랜드 무프티가 되는 셰이크 압둘 아지즈 알바아즈의 제자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배경과 인맥을 활용해 자신을 추종하는 지역 유지,종교계는 물론 사우디 국가방위군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수상한 동태를 눈치챈 사우디 내무부 산하 특별 보안군에 의해 1978년 체포 및 구금되었을 때도 자신의 사상을 점검했던 스승으로부터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평가를 얻어내면서 석방될 수 있었을 정도로 말이죠.



주하이만 알오타이비는 수감 도중 만났던 무함마드 압둘라 알까흐따니와 의기투합하여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둘 사이의 유대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다지고, 이미 신정국가가 된 이란의 시아파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말론의 마흐디 컨셉을 가져와 자신의 매제를 심판의 날 몇 년 전에 지구에 온 마흐디로 내세운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주하이만 알오타이비와 그의 추종자들은 무함마드 압둘라 알까흐따니를 현세에 재림한 마흐디로 만들기 위해 교리의 일부를 끌어오게 됩니다.

- (직계 핏줄은 아닐지언정)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같은 이름 (압둘라)를 가지고 있고,

- 북쪽에서 메카로 왔으며,

- 아랍 제국을 건설할 것이고,

- (사우드 씨족이 통치하면서 가져온 서구화라는 재난으로 신실한 이슬람을) 탄압하고 있는 세상을 정의와 공평으로 채울 것이며,

- 넓은 이마와 오똑한 코와 짙은 눈썹을 가지고 있다.... 등등등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짝퉁 마흐디 무함마드 압둘라 알까흐따니의 사체)


히즈라력으로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1400년 1월 1일 새벽 5시경 주하이만 알오타이비와 그들의 마흐디 무함마드 압둘라 알까흐따니, 그리고 200여명의 추종자들이 5만여명의 무슬림들이 새벽 기도를 준비하던 그랜드 모스크에 난입하여 모스크를 걸어잠그고 2주간에 걸친 모스크 점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들이 모스크를 손쉽게 점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우디 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던 부유한 추종자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중화기로 무장할 수 있었던데다, 사우디 국가방위군 하사 출신 주하이만 알오타이비를 포함한 일부 추종자들이 국가방위군 출신이어서 나머지 추종자들까지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랜드 모스크를 지키던 국가방위군 인맥을 활용하여 점거사건 몇 주전부터 무기를 모스크 내부에 밀반입시켜 곳곳에 숨겨놓아 충분한 화력까지 준비시켜 놓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드리러 왔다가 얼떨결에 인질이 된 5만여명의 신도들 중에서도 테러범들이 내세운 짝퉁 마흐디를 진짜로 믿어버리면서 수적 우세를 앞세워 저항하기는 커녕, 이들 중 테러범들의 추종자로 돌면하면서 세력을 500여명 가량으로 늘릴 수 있었던 것은 덤.


그랜드 모스크가 무장세력에 의해 점거되었다는 소식이 세간에 돌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이란의 혁명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라디오 연선을 통해 흉폭한 미제국주의자들과 국제 시오니스트들의 작품이라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면서 범 무슬림 세계의 반미감정에 불을 지핀 것은 또 하나의 덤.


왕세제 파흐드 왕자는 아랍 정상회담에 참석차 튀니지를 방문 중이었고, 그랜드 모스크 치안 담당인 국가방위군의 사령관 압둘라 왕자는 모로코 공식 방문 중으로 직접 책임자가 공석인 가운데 칼리드 국왕은 국방부 장관 술탄 왕자와 내무부 장관 나이프 왕자 (두 왕자 모두 압둘라 국왕시절 왕세제까지 올랐으나 나란히 사망해 왕위에 오르지못하고 그 친동생인 살만 왕자가 압둘라 국왕 사후 국왕이 되었습니다)에게 사태해결의 책임을 맡겼으나, 무력 사용이 금지된 그랜드 모스크로의 진압작전 수행에 부담감을 느낀 나머지 바로 진행하지 못하고, 성직자들에게 파트와를 받기 위해 대기해야만 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면서 진압작전은 시작부터 삐그덕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필, 그 파트와를 낼 권한이 있는 성직자가 한때 주하이만 알오타이비의 스승이었던 셰이크 압둘 아지즈 알바아즈였던 것이 함정.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특수부대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이어진 2주 간의 대치 끝에 사우디군 127명 사망, 451명 부상 및 민간인 26명 사망, 짝퉁 마흐디 무함마드 압둘라 알까흐따니를 포함한 117명의 테러범 사망 및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 않은 부상자가 발생한 후 사우디 정부로서는 자신들의 정통성에 먹칠을 한 치욕적인 점거사건이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이슬람 혁명으로 신정 국가로 변신한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탄생과 수니파의 역린이자 시아파가 강조하는 마흐디 재림을 앞세운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이 불과 몇 달만에 이어진 것은 사우디가 이란의 영향력 확대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메카를 지키면서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임을 자임했던 셰리프 후세인을 밀어버리고 사우디 왕가를 세웠던 세속주의 정권인 사우드 씨족으로서는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1982년 취임한 파흐드 국왕부터 파이살 전 국왕이 가져왔던 "양대 성지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사우디 국왕의 공식 칭호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에 이라크를 지원하는 등 이란의 역내 영향력 확대에 있어서만큼은 그야말로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그나마 이란의 영향력 확대에 방패막이가 되어왔던 후세인 정권을 미국이 붕괴시키면서 이라크와 시리아 일대를 아사리판으로 만든건 그야말로 흠좀무;;;;)    


 

3. 1979년 이벤트 후 사우디 사회의 암흑기- 고삐풀린 종교경찰의 탄생과 전성기, 무슬림 형제단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이 과정에서 사살되지 않고 생포된 주범 주하이만 알오타이비 등의 잔당 처리를 놓고 그간 사우디 정부의 위세에 숨죽이고 있던 보수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에게 온 절호의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아무런 권능도 없으면서 양대 모스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종주국임을 자임하고 있는 사우드 씨족이 불과 몇백명의 테러범들에게 제대로 털렸기에 자신들의 입지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종교세력의 목소리를 반대할 명분이 없었으니까요. 


최고성직자위원회는 점거사건 종료 5일만인 1980년 1월 9일 테러범들에 대해 이들이 저지른 일곱가지 죄악을 처벌하기 위한 파트와를 내려 사우디 정부의 손을 빌려 61명의 주동자들을 부라이다, 담맘, 메카, 매디나, 리야드, 아브하, 하일 및 타북의 8개 도시 내 광장에서 공개 참수형에 처하게 됩니다. 공개 참수형장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불만세력들에게 쉽게 소식이 전파될 수 있는 장소를 엄선했다고 하네요. 이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성지 그랜드 모스크의 존엄성을 훼손한 죄

- 이슬람력 1월의 신성함을 훼손한 죄

- 무슬림과 다른이들을 살해한 죄

- 전통성있는 당국에 불복종한 죄

- 그랜드 모스크의 예배를 중시킨 죄

- 마흐디를 사칭한 죄

- 죄없는 사람을 자신들의 테러행위에 이용한 죄


테러범들에 대한 처벌을 마무리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칼리드 국왕은 "종교로 인해 발생한 대변동은 보다 많은 권한을 종교에 부여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사건을 일으킨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추가 탄압 대신 오히려 성직자와 극단주의자들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주게 됩니다.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데다, 무엇보다 국왕 자신이 철권통치를 행할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죠. 종교세력의 목소리를 반영한 후속조치로 신문에서 여성사진을 싣지 못하게 한 후, 방송에서도 여성 출연을 금지시켰으며, 학교 커리큘럼을 종교적인 수업으로 개편하고, 공공장소에서의 남녀간 격리를 허름한 커피숍으로 확대적용시켜 버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우디하면 떠오르는 극보수화된 사회로 격변하는 기반을 닦게 됩니다. 


사흐와 운동은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이자 이슬람 과격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이드 쿠틉이 발전시킨 극단적인 지하디즘 이슬람주의 이론인 사우디 쿠트비즘의 한 분파입니다. 



1950~60년대 이집트 사회주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사우디로 흘러들어온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원들이 사우디의 와하비스트들과 논쟁을 펼치며 서로 영향을 끼친 끝에 과격주의자와 원리주의자가 결합하여 세속주의 왕가의 특권을 줄이고 공공자금의 투명성을 높이면서 성직자들에게 보다 많은 정치적인 역할을 부여하며, 서구문화의 영향이 확산을 막는 것으로 더욱 이슬람적인 보수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하이브리드 종교적 정치 활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사우드 왕가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신정 국가로의 길을 모색할 것만 같은 끔찍한 혼종 => 이는 사흐와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는 이유

세속적인 사우드 왕가를 반대하는 입장에선 개혁 운동 => 이는 사우디 왕가의 사흐와 세력 탄압을 비판하게 되는 이유


이러한 사회의 격변 속에 보다 좋은 무슬림이 되는 길을 안내하고, 사우디 사회 안에서 관용적이고, 낙천주의적이며, 개방성을 강조하는 정신적인 가이드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1940년대 설립된 권선징악청은 1980년 9월 5일 왕실 칙령 37호에 의해 강경하고 보수적인 생활지침을 계도하는 종교 경찰청 신설과 더불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사우디 사회를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사회로 탈바꿈시키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에 취한 종교경찰은 자신의 본분을 잊고 이름에 걸맞지 않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월권행위도 불사하는 권력의 탈을 쓴 과격주의자 집단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해가 갈수록 일반 사우디 시민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우디 종교경찰의 만행은 다수의 사건을 통해 사우디 내외의 공분을 사게 됩니다.


여학교 안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여학생들이 아바야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방관들의 구조작업을 훼방놓아 결국 15명의 여학생을 살해하기에 이른 2002년의 메카 여학교 화재사건, 쇼핑몰 내에서 본 영국인 남성과 사우디 여성 부부를 부적절한 관계로 오인하여 쇼핑몰 주차장까지 쫓아가 영국인 남성을 구타한 2014년 쇼핑몰 구타사건 ([회] 사우디 권선징악청, 영국인-사우디인 부부 폭행사건으로 파문을 일으킨 현장요원 징계 및 부부에게 공식 사과! 참조)은 국제적인 관심과 공분을 산 바 있으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과도한 추격전을 펼쳐 사우디 시민과 관광객들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고, 음악학원을 파괴하고, 미용실을 급습하고, 머리를 밀어버리거나 사람들에게 채찍찔을 가하고, 책을 불태우는 등 크고작은 수많은 악행이 계속되었습니다.



4. 날뛰던 종교경찰의 폭망, 그리고 극단주의 종교세력의 쇠락- 1979년 이전으로의 회귀  

왕세제 시절 메카 여학교 화재사건을 보면서 권선징악청의 개혁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압둘라 국왕은 과격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과격주의 성직자들을 자리에서 몰아내고 ([사회] 사우디, 2003년 이후 이슬람 과격주의 성직자 3,500명 해고해! 참조) 종교경찰청장을 보다 온건한 인물로 교체해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는 등 ([사회] 사우디 종교경찰이 과격 원리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유! 참조) 온건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미 고삐풀린 사냥개가 되어버린 일선 요원들의 반발로 인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그들의 권세는 계속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종교경찰의 위세는 살만 국왕 통치기인 2016년 4월 11일에 내려진 예상치 못한 왕실 칙령으로 인해 꺾이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각료회의가 내린 종교경찰들이 누리고 있던 온갖 특권; 의심스러운 용의자에 대해 행사할 수 있었던 추격, 취조, 신분조회, 체포 및 구금권을 한꺼번에 박탈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사우디 정부는 1979년 이후 사우디의 강경 보수화를 이끌었던 사흐와 운동의 핵심 성직자들을 잇달아 구속하여 사형, 혹은 징역형을 내리면서 과격주의 종교세력의 영향력을 현격하게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들의 죄목은 정부가 붙여버리기 나름이라서 국제 인권단체들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만...


살만 알아우다: 이슬람 학자. 2017년 9월 체포. 사형 대기중.


아와드 알까르니: 설교자 겸 학자. 2017년 9월 체포. 사형 대기 중 


알리 알오마리: 테러리즘과 관련된 30여개 범죄혐의가 부여된 작가, 미디어 퍼스낼러티. 2017년 9월 체포, 사형 대기 중



사파르 알하왈리 알감디: 무함마드 쿠틉에게 배웠으며 사우디의 외교정책을 비판한 원로 종교학자. 2018년 7월 재구속 후 수감 중.


나세르 알오마르: 미군의 중동지역 주둔을 강력하게 비판해 온 성직자, 학자 겸 설교자. 2018년 7월 구속 후 수감 중.



살만 국왕과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비전 2030 선포에 이어 2017년 10월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의 회귀를 천명하고 사우디 사회에서 몇 십년동안 금기시해왔던 모든 것들을 불과 몇 년 사이에 잇달아 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내 종교세력들이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사회 개방정책에 어깃장을 놓을 수 있는 영향력 높은 집단과 성직자들을 침묵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우디 건국 이래 최초로 3개 파벌이 나눠먹으며 세력균형을 유지해왔던 사우디 군부 (술탄 왕자->살만 국왕파), 친위대 국가방위부 (압둘라 국왕파), 내무부 산하 특별치안군 및 사정 기관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파)을 일련의 숙청작업을 거쳐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기에 가능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2008년 2월 발렌타인 데이를 공식적으로 불허하는 파트와를 내놨던 권선징악청이 불과 10년만인 2018년 2월에는 이를 인정하는 개정된 파트와를 내놓고 종교경찰이 앞장서서 장미꽃을 나눠주는 믿지 못할 풍경을 보여줬던 것이야 말로 사우디 사회의 주도권이 종교세력에서 정부로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였으니까요. ([사회] 발렌타인 데이 금지조치 해제로 본 사우디 사회 내 종교세력의 정치적 입지 변화 참조)



출처: 1979 Grand Mosque seizure (위키피디아)

       Juhayman al-Otaybi (위키피디아)

       Who are the key Sahwa figures Saudi Arabia is cracking down on? (Al-Jaze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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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 사우디_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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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랍지역 전문 블로거 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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