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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C&GU/UAE

[두바이] 천당과 지옥을 오간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쉬드 알막툼의 두바이 통치 10년

둘라 2016. 1. 5.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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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4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UAE부통령 겸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쉬드 알막툼의 취임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95년 1월 3일 형인 셰이크 막툼 빈 라쉬드 알막툼이 내린 칙령에 의해 왕세제로 지명되고 사실상 두바이를 이끈지 11년만에 형의 사망으로 공식적인 통치자가 된 날이죠.


셰이크 라쉬드의 3남인 그는 19살이던 1968년 1월, 위임통치령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영국군이 철수의사를 통보함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아버지 셰이크 라쉬드와 외가쪽 친척이기도 한 아부다비의 셰이크 자이드가 토후국들의 연합국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아부다비와 두바이 사이의 사막에서 처음 만난 자리에 동석했고 3년 뒤 UAE가 건국 되었을 때 초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젊은 시절에는 국방장관 겸 두바이 경찰총장 및 두바이 방위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경력을 쌓았습니다.


UAE와 두바이의 공권력의 수장을 겸임하던 그는 재계로 활동영역을 넓히기 시작하여 두바이 통치자가 되기 전 오늘날까지도 두바이를 대표하게 되는 상징물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85년에는 오늘날 세계적인 항공사로 자리잡은 A380 덕후 에미레이트 항공을 만들었고, 왕세제가 된 이후엔 1999년 7성급 호텔이란 이름을 스스로 붙인 부르즈 알아랍 개장 (현재 확장공사 중), 그리고 2001년에는 팜 주에미라의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1. 두바이 통치자 취임, 주목받는 리더쉽 (2006년 취임~2008년 경제위기)

두바이를 대표하게 된 3대 상징과 함께 사실상의 통치자 역할을 맡았던 왕세제 시절 이끌었던 다양한 프로젝트로 세계의 이목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그가 공식적으로 두바이 통치자가 된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아랍, 특히 걸프지역에 관심도 없던 국내 출판업계에서 셰이크 무함마드와 그의 리더쉽, 두바이의 기적 등을 다룬 기획서적이 잇달아 나올 정도였습니다. (두바이에 관한 책들이 궁금하시면.... 클릭!) 우리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국내 정치계에서 두바이를 벤치마킹하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당시에는 개인적으로는 두바이에 대한 큰 관심이 없었음에도 국내에서 필요이상으로 두바이에 대해 보이는 과잉관심에 기이함을 느꼈었기에 다수의 두바이 관련 기획서적을 출판했던 출판사 관계자와 만났을 때는 셰이크 무함마드와 두바이에 관련 서적을 계속 내겠다며 의욕을 밝히던 관계자에게 두바이만 보지 말고 주변의 다른 곳도 관심을 두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던지기도 했었고, 2007년에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포스팅한 적도 있었습니다. ([칼럼] 두바이 발전에 대한 단상... 참조) 지금보면 많이 어설픈 글과 생긱이긴 합니다만....^^  



2. 경제위기로 맛본 굴욕, 그리고 와신상담 (2008년 경제위기~2013년 엑스포 유치)

그의 취임 전부터 취임 후로 잇단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끝을 모르고 발전할 것만 같았던 두바이는 결국 2007~2010년 글로벌 경제 위기에 직격타를 맞으며 2008년부터 거품이 붕괴되면서 몰락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세계적인 주목을 끌던 급성장의 이면엔 세계 경제가 침체되면 직격타를 맞을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야심찬 프로젝트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지어진 건물조차 매매가 안되는 등 자금 흐름이 꼬이기 시작하자 두바이는 결국 SOS를 치게 됩니다. 결국 2009년 3월엔 아부다비 정부와 UAE 중앙은행으로부터 상환기간 5년의 융자를 받게 되고, 11월엔 셰이크 무함마드가 취임한 직후 세웠던 두바이 월드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되었으니까요. (그 후 상환기간인 5년 뒤에 완전히 갚지는 못하고 대신 상환기간 연장과 대출이자를 인하받으며 상환기간을 늘려나가고 있다.)


(두바이 최고층 건물 부르즈 칼리파/구 부르즈 두바이)

앞만 보고 쳐달리며 기세좋게 달려나가다 꺾인 두바이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현재까지도 세계 최고층 건물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부르즈 칼리파입니다. 두바이의 자존심을 걸고 세웠던 초고층 건물로 셰이크 무함마드가 왕세제였던 2004년 1월 6일 착공에 들어가 취임 4주년을 맞아 정식 개장한 2010년 1월 4일 개장식이 열린 오후 8시가 되기 몇 시간 전까지 부르즈 두바이라 불리웠던 이 건물은 공식 개장식과 함께 현재의 이름인 부르즈 칼리파를 얻게 되었습니다. 두바이의 자존심을 걸고 두바이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을 구원해 준 아부다비 통치자 셰이크 칼리파에게 세계 최고층 건물의 이름을 헌사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 개장식, 더 이상의 부르즈 두바이는 없다! 참조) 네.. 그렇습니다. 1월 4일은 셰이크 무함마드의 취임일이자 부르즈 칼리파의 정식 개장일입니다. 


(아부다비 최고층 건물 부르즈 무함마드 빈 라쉬드/구 월드 트레이드 센터)


2010년 셰이크 무함마드로부터 두바이 최고층 건물의 이름을 헌사받았던 셰이크 칼리파는 2014년 11월 개장한 아부다비 최고층 건물의 이름을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부르즈 무함마드 빈 라쉬드로 바꿔 감사를 표하고 UAE를 이끄는 양대 토후국간의 끈끈한 관계를 과시했었지만요.)



3. 극적인 재도약, 그리고 이를 위한 노력 (2013년 엑스포 유치~현재)

몰락 직전에서 숨통이 트인 두바이는 와신상담하며 다시 일어설 기회를 노렸으며, 2008년 위기 이전으로 돌아오는데만 거의 5년이 걸렸습니다. 2013년 경기가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간의 침체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던 두바이는 다시 주목받기 위해 슈퍼카 순찰차 컬렉션 시리즈를 소개하는 등의 허세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두바이] 슈퍼카 덕후 두바이 경찰의 럭셔리 순찰차 컬렉션! 참조) 그리고 2013년 11월 두바이가 다시 일어섰음을 전세계에 보여주고자 국운을 걸다시피 총력적으로 매달렸던 2020년 엑스포 유치전에 최종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두바이] 2020년 세계 엑스포 개최지로 최종 선정! 참조) 


그리고 기네스북 세계 기록에 도전하는 성대한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2014년부터 시작했습니다. ([두바이] 40만발의 폭죽과 함께 새해를 연 두바이의 새해맞이 불꽃놀이! 참조) 2015년에도 바로 자신들이 세운 기록을 경신한데 이어 2016년에도 역대급 불꽃놀이를 준비했다고 자신만만하게 나섰지만, 새해를 2시간 반 앞두고 부르즈 칼리파 맞은편에 위치한 디 어드레스 다운타운 두바에서 발생한 대형화재로 머쓱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화위복으로 67층 건물의 40층을 태워먹은 대형화재였음에도 사망자가 단 한 명도 없었음은 두바이의 위기관리능력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확실한 무대가 되긴 했습니다만...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 새해맞이 불꽃놀이, 그리고 직접 지켜본 두바이 호텔 화재 뒷 이야기 참조)


경기 회복과 엑스포 유치 등에 힘입어 두바이는 경기 침체 시에 공표했던 비전 2021 ([비젼] UAE의 홍보 브로우셔 Vision 2021 (영어/아랍어) 참조)을 새롭게 다듬고 2020년까지 관광객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비전 2020 ([두바이] 연간 2천만명의 여행객을 유치하기 위한 비전2020 승인! 참조) 추진에 날개를 달아 의욕적인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하기 시작하면서 비전을 제시함과 동시에 ([경제] 앞으로 수년 내에 두바이를 변모시킬 10대 개발 프로젝트 참조) 우리나라보다 훨씬 이용하기 쾌적한 전자정부 구축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도한 모바일 정부를 안정화시키는 등 정부정책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이는데도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석유수입에 의한 의존도가 6% 밖에 되지 않아 전년도 대비 예산 축소 및 적자예산 편성에 들어간 이웃 GCC 국가들과 달리 여유로운 예산 편성에다 2015년보다 12% 증액된 예산을 편성한 두바이는 그 어느 정부보다 첨단IT 기술흡수에 적극적인 얼리어답터 기질을 과시하며 지금껏 닦아온 기반에 첨단과학과 기술을 접목시켜 투명성과 내실을 함께 다지고 있는 듯 합니다. 후계자인 왕세자 셰이크 함단 빈 무함마드 알막툼에게도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여 후계자 수업을 시켜 안정적인 왕위 승계에 대비하고, 예멘 전쟁에도 참전하고 디 어드레스 다운타운 두바이 화재 진압현장에 투입되어 국민들의 신망을 얻은 또다른 아들 셰이크 만수르 빈 무함마드 알막툼의 활약 등으로 안정적인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또한 꾸준하게 해오고 있지만요.


이러한 노력으로 한차례의 큰 위기를 겪은 두바이의 인구는 셰이크 무함마드가 취임했던 2006년에 140만명에서 10년이 지난 현재는 250만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런저런 내우외환을 앓고 있는 걸프 국가들 중에서도 불안요소가 적은 가장 안정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트로, 트램 등 대중교통 수단 최초 도입 ([여행] 놀 교통카드부터 트램까지, 두바이 여행객들을 위한 두바이 대중교통 정보! 참조) 등의 적극적인 정책추진으로 이웃 국가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정도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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