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C/GU/UAE2019.08.25 23:24


샤르자, 아즈만, 움 알꽈인, 라스 알카이마, 푸자이라가 있는 UAE의 북부 지역과 오만 국경지역 일대를 자세히 보면 흥미롭다 못해 골때리는 지역들을 스치듯이 지나가게 됩니다.

1) UAE에서 육로로 비자런을 해야 하는데 오만 본토와는 동떨어진 아라비아 반도 북쪽 끝에 위치한 오만 땅 캇삽쪽 국경을 간다던가... ([비자] 길어지는 비자수속 과정에서 한번은 거쳐야 되는 UAE-오만 비자런 참조)

2) 심지어 캇삽에서 오만만을 따라 해안도로로만 내려오게 될 경우 넓지도 않은 지역이 세 곳으로 나뉘어진 딥바 알바야 (오만), 딥바 알히즌 (샤르자), 딥바 알푸자이라 (푸자이라)를 거쳐 푸자이라, 코르팟칸 (샤르자) ([사르자] 오만 만과 푸자이라에 둘러싸인 항구 도시 코르팟칸의 관광지, 코르팟칸 비치 참조), 푸자이라, 칼바 (샤르자), 푸자이라를 거쳐야만 오만으로 연결이 된다던가...

3) 코르팟칸에서 푸자이라로 내려가는 길에 길을 잘못 빠지면 잘 알려지지는 않은 UAE 내 또 하나의 오만 영토인 마드하로 연결되고, 그 길을 따라 쭈욱 가다보면 샤르자 땅인 나흐와를 지나 또다시 마드하를 거쳐 라스 알카이마와 푸자이라의 경계 지역으로 들어서게 된다던가...

4) 라스 알카이마와 오만의 국경 지역일 줄 알았던 곳 한 켠에 뜬금없이 두바이 땅 핫타가 있다던가...

UAE 북부와 오만 북부 지역은 경계가 엄청 모호해 굳이 오만으로 넘어가지 않는 한 여러 나라를 지나치면서도 국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 관심있게 보지 않으면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뭐... 동네 분위기 자체가 다르긴 합니다만... 





그런데 말입니다...

왜 이 동네 국경은 경게도 모호하게 그야말로 난잡하게 뒤섞여 있을까요? 


이 모든 복잡한 국경의 시작은 아라비아 반도 내 식민제국이자 UAE 일대를 통치했던 오만해양제국 (1692년~1856년)의 흥망성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 모든 것의 시작, 오만해양제국의 흥망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시발점이 된 사우드 씨족의 첫 국가 디리야 토후국이 아라비아 반도 복판에 건국을 선포했던 1744년 ([역사] 사우디는 어떻게 건국되었을까? 사우드 씨족의 오랜 투쟁기,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참조)으로부터 50여년 전인 1692년 아라비아 반도 남동쪽 끝에서는 야루바 왕조의 네번째 이맘 (통치자) 사이프 빈 술탄이 관개수로를 도입해 내륙지역에 물을 공급하면서 발달시킨 농업으로 일군 경제를 바탕으로 힘을 키워 그동안 오만 일대를 점령해왔던 포르투갈군을 내쫓은 후 알바티나 지역의 마을 루스타끄를 도읍지로 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이 나라가 북쪽으로는 호르무즈 해협을 너머 오늘날 이란과 파키스탄의 일부 지역,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동쪽 해얀 일대와 예멘 일부, 그리고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대륙으로로 확장하여 아프리카 대륙의 동해안을 타고 오늘날의 모잠비크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식민 제국 오만해양제국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아라비아 반도 중심부에서 디리야 토후국이 선포되었던 1744년, 페르시아군의 2차 침공 중 최후의 격전지였던 소하르 주 포위 공격을 9개월 동안 버틴 끝에 결국 물러나게 만든 소하르 주의 주지사 아흐메드 빈 사이드 알부사이드가 그 기세를 이어 오만해양제국의 시작이었던 야루바 왕조를 몰락시키고 현재의 오만 통치자 술탄 까부스로 이어지는 알사이드 왕조를 건국하게 됩니다. 



오만해양제국은 1856년 통치자 사이드 빈 술탄이 사망한 후 가족간의 분열로 그의 세째 아들 쑤와이니 빈 사이드가 이끄는 무스카트 오만 술탄국 (1856~1970)과 여섯째 아들 마지드 빈 사이드가 술탄임을 참칭하며 분가한 잔지바르 술탄국 (1856~1964)으로 양분됩니다. 무스카트 오만 술탄국은 1970년 현 통치자인 술탄 까부스 빈 사이드가 영국과 이란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쿠데타로 아버지 술탄 사이드를 폐위시킨 후 패망시키고 오늘날의 오만 술탄국을 세웠으며, 잔지바르 술탄국은 그보다 앞선 1964년 패망하여 오늘날의 탄자니아가 되었습니다.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관련 논문 오만해양제국의 융성과 추락 - 한국중동학회) 참조   


아라비아 반도 내 오만해양제국의 영역이 ㄱ자 형태를 띄게 되고, 사우드 왕가쪽과 큰 갈등이 없었던 것은 바로 사우디, 오만, UAE, 예멘 사이에 있는 세계 최대의 사막 루브으 알칼리, 즉 엠티 쿼터 때문입니다. ([룹알할리] 언차티드3의 배경이 된 세계 최대의 사막 루브으 알 칼리와 잃어버린 도시 (1) 참조)



사우드 왕조가 몇 차례 흥망성쇠를 거치며 아라비아 반도 중심부의 통일 전쟁을 치루느라 신경쓸 여력도 없었겠지만, 반도의 4분의 1을 차지한 어마무시한 사막의 존재는 사우디와 오만이 국경을 맞닿고 있으면서도 육로로는 연결될 수 없었던, 가까우면서도 먼 이웃인 것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로가 막혀 사우디와 오만을 육로로 오가려면 UAE로 우회하여 총 1,700여킬로미터의 거리를 17시간에 걸쳐 가는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나마 최근들어 개통된 사우디-오만 고속도로를 뚫기 위해 1억3천만 평방미터 이상의 모래를 퍼내야먄 했다니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겠죠.




2. 오만해양제국의 위기와 알까시미 씨족의 세력화 (1747~1820)- 오만 월경지의 탄생

오만해양제국의 전반기를 이끌었던 야루바 왕조가 기세좋게 세력을 확장해 나갈 때 아라비아 반도 내 북부 변두리 지역의 로컬 유목 씨족들은 오만에 있는 이맘에게 충성을 바쳐왔었습니다. 하지만, 오만해양제국이 1738~1744년 두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고 소하르 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당하자, 움추리고 있던 지방 씨족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의 라스 알카이마 시내 일대에 자리를 잡아 토후국을 세우고 해적질과 습격으로 세력을 키워나간 알까시미 해양연합의 씨족장 라쉬드 빈 마타르 알까시미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알까시미 해양연합은 페르시아로부터 해방된 후 오만에 새로 들어선 알사이드 왕조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주둔해 있던 오만 요새와 마을들을 몰아내고 지역의 새로운 세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알까시미 씨족은 오만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면서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일부 지역은 도저히 공략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무산담주의 주도인 카삽과 위요지 마드하가 대표적인 곳으로 오늘날까지 오만의 월경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왜 공략하지 못했냐구요?


포르투갈인들이 세우고 오만인들이 물려받은 카삽 요새는 견고하기도 했을 뿐더러 험준한 바위산에 둘러쌓여 있어 해전에 능했던 알까시미 씨족의 유목전사들이 공략하기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UAE 속 또 하나의 오만 월경지로 남게 된 마드하 역시 살기에는 좋지 않는 척박한 산악환경이었기에 오만 땅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만의 월경지 마드하의 일부 지역인 나흐와는 아이러니하게도 샤르자의 월경지로 남아 "UAE 영토 내 오만의 위요지 (마드하) 내에 있는 샤르자의 월경지 (나흐와)"라는 월경지와 위요지가 뒤섞인 오묘한 동네가 되었습니다. 



캇삽, 마드하와 함께 험준한 산악지형의 도움을 받아 알까시미 씨족의 침공을 막아내고 오만의 일부로 남을 수 있었던 푸자이라는 당초 오만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19세기들어 태세를 전환하여 알까시미 씨족을 따르기로 하면서 오만의 입지가 다소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캇삽, 딥바, 마드하는 현 오만의 월경지로 남을 수 있게 되었죠.



3. 영국의 침공 및 라스 알카이마 함락으로 야기된 알까시미 왕조의 분열 (1820~1869)

서 언급한 캇삽과 마드하를 제외한 북부 지역을 점령하며 영역을 확장해갔던 라스 알카이마의 알까시미 왕조는 오만의 영향력에 있던 일부 북부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려던 야심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너무 대놓고 해적질을 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을 오가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교역을 깽판쳐놨던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들을 상대로 영국군이 보복침공을 감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알까시미 씨족은 오만 월경지 병합보다 더 막강한 대영제국의 해군을 상대하기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1809년 영국군의 라스 알카이마 1차 침공)


영국군은 1809년과 1819년 두 차례에 걸쳐 라스 알카이마를 침공한 끝에 알까시미 씨족의 군사력을 완전히 궤멸시킨 후 딴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알까시미 씨족 외에도 일대 토후국 지도자들까지 패키지로 모아 1820년 일반해상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라스 알카이마] 다야 포트, 1819년 영국군 보복침공 당시 최후까지 저항했던 토후국들의 마지막 보루 참조)


1820년 평화협정 이후 해적질을 위한 군사력을 영국군에 의해 거세당한 알까시미 씨족들은 본거지를 라스 알카이마에서 샤르자로 옮긴 후 내부 파벌간의 분열에 들어가 결국 1868년 라스 알카이마가 샤르자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후 자국 영토 안에 있던 오만의 월경지들을 빼앗아 올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되었습니다.  



4. 라스 알카이마와 샤르자로 나뉘면서 더욱 복잡해진 월경지 (1869~현재): 라스 알카이마? 샤르자? 아니면 자력갱생?

1803년 셰이크 술탄 빈 사끄르 알까시미가 취임한 이후 사우디와의 분쟁 등이 겹치면서 통치권이 조금씩 나뉘기 시작하던 샤르자와 라스 알카이마는 1868년 셰이크 살림 빈 술탄 알까시미가 취임하면서 갈라지게 됩니다. 그의 즉위 1년 후인 1869년 조카 셰이크 후마이드 빈 압둘라 알까시미가 샤르자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움 알꽈인의 지원을 받아 자지라 알하므라와 라스 알카이마에서 전투를 벌렸고, 이에 영국군이 해상조약 위반을 문제삼아 샤르자군을 철군시키면서 라스 알카이마 일대를 장악한 셰이크 후마이드는 독립 토후국 라스 알카이마를 선언하게 됩니다. 샤르자 통치자 셰이크 살림은 자신이 직접 라스 알카이마를 다시 복속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포기하게 되죠.


라스 알카이마는 독립을 선언했던 셰이크 후마이드가 사망한 후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서 또다시 샤르자의 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1921년 세이크 술탄 빈 살림 알까시미가 1919년에 이은 두 차례의 청원 끝에 영국으로부터 라스 알카이마를 독립 토후국으로, 자신을 그 통치자로 인정받게 되면서 샤르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알까시미 왕조 (1727~현재)

 1. 셰이크 라흐마 빈 마타르 알까시미 (1727~1760)

 2. 셰이크 라쉬드 빈 마타르 알까시미 (1760~1777)

 3. 셰이크 사끄르 빈 라쉬드 알까시미 (1777~1803)

라스 알카이마


샤르자

 1. 셰이크 술탄 빈 사끄르 알까시미 (1803~1808)- 1기

 1. 셰이크 술탄 빈 사끄르 알까시미 (1803~1840)- 1기

 2. 셰이크 핫산 빈 알리 (1808~1814)

 2. 셰이크 사끄르 빈 술탄 빈 사끄르 알까시미 (1840)

 3. 셰이크 핫산 빈 라흐마 (1814~1820)

 3. 셰이크 술탄 빈 사끄르 알까시미 (1840~1866)- 2기

 4. 셰이크 술탄 빈 사끄르 알까시미 (1820~1866)- 2기

 

 5. 셰이크 이브라힘 빈 술탄 알까시미 (1866~1867)

 4. 셰이크 칼리드 빈 술탄 알까시미 (1866~1868)

 6. 셰이크 칼리드 빈 술탄 알까시미 (1867~1868)

 5. 셰이크 살림 빈 술탄 알까시미 (1868~1883)

 7. 셰이크 살림 빈 술탄 알까시미 (1868~1869)

 6. 셰이크 사끄르 빈 칼리드 알까시미 (1883~1914)

 8. 셰이크 후마이드 빈 압둘라 알까시미 (1869~1900)

 7. 셰이크 칼리드 빈 아흐마드 알까시미 (1914~1924)

 

 8. 셰이크 술탄 (2세) 빈 사끄르 알까시미 (1924~1951)

 9. 셰이크 술탄 빈 살림 알까시미 (1921~1948)

 9. 셰이크 무함마드 빈 사끄르 알까시미 (1951)

 10. 셰이크 사끄르 빈 무함마드 알까시미 (1948~2010)

 10. 셰이크 사끄르 빈 술탄 알까시미 (1951~1965)- 1기

 11. 셰이크 사우드 빈 사끄르 알까시미 (2010~현재)

 11. 셰이크 칼리드 빈 무함마드 알까시미 (1965~1972)

 

 12. 셰이크 사끄르 빈 술탄 알까시미 (1972)- 2기

 

 13. 셰이크 술탄 빈 무함마드 알까시미 (1972~1987)- 1기

 

 14. 셰이크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알까시미 (1987)

 

 15. 셰이크 술탄 빈 무함마드 알까시미 (1987~현재)- 2기

 ** 이름이 볼드체로 적혀있는 통치자는 임기 전체, 혹은 일부 기간 동안 두 토후국을 동시에 통치.


북부 지역을 호령하던 알까시미 왕조가 샤르자와 라스 알카이마로 양분되면서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군소 씨족과 마을들은 어느 토후국을 선택해 자신들을 의탁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라스 알카이마는 샤르자와 푸자이라, 그리고 아즈만에 의해 허리가 잘라진 채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샤르자는 오만만에 있는 코르팟칸과 칼바를 자신의 월경지로 확정짓게 되었습니다.



당초 오만에서 샤르자에 붙기로 배를 한 번 갈아탔던 알샤르끼 씨족의 푸자이라는 또다시 태세를 전환하여 셰이크 하마드 빈 압둘라 알샤르끼가 1879년 샤르자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키면서 기나긴 독립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셰이크 하마드는 오랜 투쟁 끝에 1901년 영국을 제외한 모든 당사자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게 되며, 토후국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영국은 결국 1852년이 되어서야 푸자이라를 독립된 토후국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5. 알까시미 씨족 분열로 이합집산하는 어수선한 사이 농경지대와 본거지를 확보한 아즈만

UAE의 북부지역이 씨족과 마을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사이 UAE 토후국 중 가장 작은 토후국인 아즈만은 샤르자, 라스 알카이마와 푸자이라에 둘러쌓인 농경지대인 마나마, 그리고 아즈만을 통치하는 알누아이미 씨족의 본거지인 마스푸트를 월경지로 확정하게 됩니다. 특히 마나마의 경우 1920년대 후반 세계 대공황과 일본이 본격 수출에 들어간 양식 진주의 확산으로 인해 진주 산업이 타격을 입게 되자, 곡창지대로서의 잠재성을 인지한 통치자 셰이크 라쉬드 빈 후마이드 알누아이미 3세가 적극 투자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6. 오만과 아즈만간의 분쟁 사이에서 얼떨결에 월경지를 얻게 된 두바이

그리고 두바이는 하쉬르 빈 막툼이 통치하던 1870~80년대 이웃 지역인 마스푸트에 정착하고 있던 알누아이미 씨족으로부터의 위협을 지켜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오만의 술탄 투르키 빈 사이드로부터 하자라인이라 불리던 작은 산악 마을을 양도받게 됩니다. 그 작은 마을이 아즈만, 라스 알카이마, 오만에 둘러싸인 두바이의 유일한 월경지 핫타입니다.   




7. 결정적인 이유는 그 누구도 쉽게 오가기 힘들었던 산악지역이기 때문!

UAE 북부 지역의 국경이 그야말로 난잡한 이유는 거주가능한 일부 지역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기는 해도 UAE 내 대부분의 지역과 달리 하자르 산맥에서 비롯된 산악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유목생활이 중심이 이들에게 있어서 산악지역은 오가는 것은 물론,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이 저항할 경우 쉽게 영역을 확장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산악 지역 및 산악 지역에 인접한 농경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중심지인 도심과 달리 다양한 자연환경을 어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두바이와 아즈만은 자신들의 월경지인 핫타와 마나마/마스푸트에 대한 대대적인 걔발계획을 최근 몇 년 사이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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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랍지역 전문 블로거 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