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C/GU/GCC/GU2019. 6. 28.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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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열리는 G20에 참가하는 길에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순방을 즈음하여 제 블로그 방문객수가 평상시보다 몇 배나 늘어났는데, 유입 검색어를 보니 "빈 살만 왕세자 부인", "무함마드 빈 살만 부인", "사우디 왕세자 부인" 등의 검색어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그의 부인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다룬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도 없으면서 클릭질 유도를 위해 제목으로 낚는 일부 포스팅들과 함께 검색된 탓이었겠죠. 그래서... 한 번 찾아봤습니다. 


현재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자는 지난 2008년 사라 빈트 마슈후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공주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습니다. 

살만 빈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아버지의 이름을 따왔고...)

마슈후르 빈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장인 어른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파흐다 빈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누라 빈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두 사람의 이름에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공통적으로 들어간 것에서 볼 수 있듯 두 사람은 사촌지간입니다. 그의 장인 어른인 마슈후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자 (1942년생)는 1935년생인 아버지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의 이복동생인 셈이죠. 차기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는 충성 위원회 (Allegiance Council) 회원이기도 한 마슈후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자는 전임 압둘라 국왕이 재임 중이던 2009년 8월 The Washington Institute for Near East Policy에 의해 노쇠한 압둘라 국왕 사후의 잠재적인 왕위 계승자로 여겨진 바도 있습니다 (원문 참조) 10년이 지난 지금은 사돈이자 이복형이 왕이 되고, 당시엔 듣보잡 왕자 중 하나에 불과했던 그의 사위가 실세가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 결혼식 사진. 가장 왼쪽이 장인 마슈후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자다.)


하지만,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가 사라 빈트 마슈후르 공주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다는 사실만 텍스트로 알려져있을 뿐, 정작 그 주인공인 사라 공주는 공식석상에 한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흔한 사진 한 장 없어서 일각에선 그가 결혼한게 맞긴 맞냐? 이런 걸로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은 아랍쪽에선 결혼 11년 만인 올해 1월 말 트위터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진 바 있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부인, 사라 빈트 마슈후르 공주)


워낙 유명한 실세의 부인인 그녀의 모습을 왜 보기 힘들까요? 결혼 11년동안 딱 한 번 사진이 공개된 것으로 보아 그녀는 걸프왕정이나 아랍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내조형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걸프지역 왕정국가를 통치하는 왕실의 부인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이름만 알려질 뿐, 특히 결혼한 뒤에는 얼굴사진 등이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습니다.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안쪽에 여성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을 두고, 문에서 가까운 공깐에서 외부손님을 맞이하는 전통적인 가옥구조나, 유목민의 후예인 그들의 생활패턴 특성상 밖으로 나다니는 사회활동은 남자가 하는 전통에 따라 통치자, 혹은 차기 통치자 등 권력의 핵심 인물과 결혼한 거의 대부분의 부인들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인 내조형 부인으로 지내게 됩니다. 


그나마 이름과 함께 얼굴이 알려지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장 많은 아들을 낳아 여러 부인들 중에서도 남편의 총애를 받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입니다. 특히, 나라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여러 씨족장들과 정략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 세대의 부인이 이에 해당합니다. 걸프지역의 3대 국가인 사우디, UAE, 카타르 왕실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여걸이 한 명씩 있습니다.



1.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친할머니, 훗사 빈트 아흐메드 알수다이리 (1900~1969)

오늘날의 사우디를 건국한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의 여덟번째 부인인 그녀는 압둘아지즈와 1913년에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압둘아지즈 국왕의 이복형제와 결혼했다가 그녀를 잊지 못한 압둘아지즈에 의해 이혼한 후 1920년에 또다시 그와 결혼하여 1953년 사망할 때까지 혼인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총애하는 부인이었습니다. 결혼과 재혼을 반복한 영화같은 사연보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두번째 결혼 후 압둘아지즈 국왕의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일곱명의 아들(과 다섯명의 딸)을 낳으면서 최다 파벌이 된 수다이리 세븐의 모친이기 때문입니다. 네... 현 살만 사우디 국왕의 어머니이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할머니이죠. 수다이리 세븐 중에는 첫째 아들 파흐드와 여섯째 아들 살만이 사우디 국왕에 올랐으며, 둘째 아들 술탄과 넷째 아들 나이프는 전임 압둘라 국왕 시절 왕세제까지 올라갔다가 생각보다 장수한 그보다 먼저 세상을 뜨면서 왕세제로 만족해야만 했고, 셋째 아들 압둘라흐만과 다섯째 아들 투르키, 막내 아흐메드는 왕위 계승경쟁에서 밀려난 바 있습니다.



2. UAE의 국모이자 셰이크 만수르의 어머니, 셰이카 파티마 빈트 무바라크 알깨뜨비 (1943~  )

전통춤을 추는 모습에 반했다고 알려진 UAE의 국부 셰이크 자이드와 알아인에서 결혼한 세번째 부인이자 7명의 부인 중 그가 죽었을 때까지 혼인관계를 유일하게 유지했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던 그녀는 현재 아부다비 왕세제인 장남 셰이크 무함마드를 비롯하여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다섯째 아들 셰이크 만수르 등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아 가장 많은 아들을 안겨준데다 자신의 아들들을 정부의 요직으로 이끌었습니다.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흐얀- 현 아부다비 왕세제이자 병약한 셰이크 칼리파 대신 실질적인 아부다비 및 UAE 통치자

셰이크 함단 빈 자이드 알나흐얀- 현 알다프라 지역 통치자 대리인

셰이크 핫자 빈 자이드 알나흐얀- 현 국가안보자문위원회 의장 겸 아부다비 최고 위원회 부의장 겸 에미레이트 주민등록청장 등...

셰이크 타흐눈 빈 자이드 알나흐얀- 현 금융계 종사

셰이크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흐얀- 현 UAE 부총리 겸 대통령부 장관 겸 우리에겐 돈 많은 맨시티 구단주로 더 유명한....

셰이크 압둘라 빈 자이드 알나흐얀- 현 외교국제협력부 장관

이와 더불어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UAE여성들의 여권신장을 적극적으로 이끌면서 UAE의 국모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여권신장에 기여한 바를 높이 산 유니세프를 비롯한 다섯개 유엔 조직으로부터 1997년 수상했으며, 아랍여성으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마리퀴리 메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알아인에서 셰이크 자이드와 살았던 궁전은 알아인에서 가장 큰 박물관인 알아인궁 박물관으로 ([여행기] 알아인 3일차 (5) UAE의 국부 셰이크 자이드가 힘을 키웠던 시작점, 알아인궁 박물관 참조)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지난해 3월 문재인 대통령의 UAE 국빈방문시 영부인 김정숙 여사는 문 대통령과 셰이크 무함마드 왕세제와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그녀가 40년 넘게 이끌고 있는 여성연합 (GWU)를 찾아 그녀를 접견한 바 있습니다. ([특집] 문재인 대통령의 UAE 국빈방문에서 들르게 될 곳은? 참조)

 


3. 카타르 하마다인 시대의 실세, 셰이카 모자 빈트 나세르 알미스네드 (1959~현재)

카타르와 외교분쟁을 벌이고 있는 사우디와 UAE 등은 현재의 카타르 정권을 하마다인 통치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두 명의 하마드라는 뜻을 가진 하마다인은 카타르의 전 통치자인 셰이크 하마드 빈 칼리파 알싸니와 현 통치자이자 그의 아들인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싸니 부자를 일컫는 것으로 이전 카타르의 통치자들과 달리 가스로 축적된 부를 활용해 미니국가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내 입지를 강화하려는 야심 속에 GCC의 양대 국가인 사우디와 UAE에 도전하는 카타르의 독특한 외교정책을 실행에 옮긴 셰이크 하마드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고 있는 셰이크 타밈 부자를 비웃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하마드 부자의 배후에는 셰이크 하마드의 두번째 부인이자 그의 퇴임 이후에도 카타르의 반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셰이카 모자 빈트 나세르 알미스네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걸프왕정의 안주인으로서는 보기드문 화려한 패션감각을 자랑하는 셰이카 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카타르를 통치하고 있는 알싸니 가문과 대립하던 알무한나다 씨족연합을 이끈 나세르 빈 압둘라 알미스네드의 딸입니다. 카타르의 전 통치자였던 에미르 아흐메드 빈 알리 알싸니 통치기에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풀려난 그는 1964년 씨족 전원을 이끌고 쿠웨이트로 셀프 망명을 떠났다가 13년 뒤인 1977년 친족들만 이끌고 카타르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 당시 왕세자였던 셰이크 하마드 빈 칼리파 알싸니의 두번째 부인으로 결혼하게 됩니다. 셰이크 하마드가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얻은 11명의 아들 중 절반에 가까운 다섯명의 아들을 낳은 그녀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습니다. 가족의 응원에 힘입어 아버지가 해외로 휴가를 떠난 사이에 정권을 장악했던 남편 셰이크 하마드의 무혈 쿠데타와 걸프 왕정에서 보기드문 생전 왕위 이양을 통해 통치권을 아들 셰이크 타밈에게 넘겨버린 파격적인 그의 퇴임 배경 이면에는 그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남편 셰이크 하마드가 카타르의 통치자가 되었던 1995년 카타르 파운데이션을 공동으로 설립하고 이를 이끌어 오면서 교육을 중심으로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카타르 정부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최고위급 인사로 셰이크 하마드 재임시절에는 영부인으로서 대외활동에도 함께 참여하기도 했던 카타르 여인천하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셰이카 모자의 경우 걸프왕정에 들어간 부인들의 이름이 알려지는 첫번째 이유인 가장 많은 아들을 낳은 부인 외에도 두번째 경우인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통해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경우 모두에 해당하는 특이한 사례입니다.



덧, 영향력 있는 안주인과 대외활동을 전담하는 부인의 역할을 양분화한 두바이의 경우

참고로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쉬드 알막툼이 통치하고 있는 두바이의 경우엔 왕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빌궁의 안주인과 대외활동으로 유명한 부인이 따로 있습니다. 자빌궁의 안주인은 첫번째 부인이자 일곱명의 딸을 포함해 셰이크 무함마드의 아홉 아들 중 다섯 아들을 낳았으며, 최근 합동 결혼식을 올린 왕세자 셰이크 함단 형제의 어머니인 셰이카 힌드 빈트 막툼 빈 주므아 알막툼 (1962~현재)으로 전형적인 내조형 부인을 자임하며 공식 석상에는 좀처럼 드러내질 않습니다.


셰이크 무함마드 집안을 이끌고 있는 셰이카 힌드 빈트 막툼 주므아 알막툼과 달리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의 이복동생이자 셰이크 무함마드의 작은 부인인 프린세스 하야 빈트 후세인 (1974~현재)은 승마 요르단 국가대표 출신의 운동선수 경력을 살려 스포츠와 자선활동 분야에 앞장서며 공개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 안주인 셰이카 힌드 대신 대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프린세스 하야는 아들도 많이 낳고 대외활동을 열심히 하는 셰이카 모자와 달리 적극적인 대외활동으로 유명세를 타는 예에 속합니다. 그녀는 셰이크 무함마드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얻었을 뿐이니까요. 2012년 셰이크 무함마드가 그녀가 낳은 아들에게 UAE의 국부 이름을 따서 자이드로 정한 것으로 봐서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최근 그녀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자빌궁 시월드에서 벗어나 해외로 도피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지난해 별일 없었던 것으로 무마되었던 라티파 공주 야반도주건에 이어 셰이크 무함마드로서는 원치 않을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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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랍지역 전문 블로거 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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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C/GU/사우디2017. 11. 8.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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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4일은 사우디 역사에 길이남을 역사적인 밤이 되었습니다.


11월 4일 밤 리야드 킹 파흐드 국제공항 부근에서 발생한 굉음이 들렸고, 사우디군은 이 굉음이 예멘의 알후씨 반군이 발사한 미사일을 인명피해없이 성공적으로 격추시켰다고 발표하면서 끝나는가 싶었는데... 미사일 사건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살만 국왕은 뜬금없이 국가방위부 장관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와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사우디-한국 비전 2030에 서명했던 아딜 파끼흐 재경계획부 장관을 경질한다는 칙령을 내리고 나서야 "사익을 위해 공익을 무시하는 연약한 영혼들이 있다"며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부패척결 최고위원회를 발족시킨다는 칙령을 내렸으며, 이 칙령을 기다렸다는 듯 자정 무렵 11명의 왕자와 38명의 전현직 장관을 비롯한 고위공무원, 사업가들을 부패, 뇌물수수, 돈세탁 혐의로 잡아들여 리츠칼튼 리야드에 구금하기 시작했으며, 이례적으로 SNS 등을 통해 누가 체포되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공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우디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한 번에 일어나기도 힘든 일이 모두 진행되는데는 불과 몇 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한 인터뷰에서 "대대적인 숙청의 밤"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없다고 밝혔으며, 구금한 사람들은 공개재판을 받아 법에 따라 엄정한 재판을 거쳐 유무죄 여부를 결정하여 유죄가 드러난 경우 국가재산으로 귀속시키겠다며 불과 4일만에 500여명 이상을 체포하고 1200개 이상의 계좌를 동결하고 그 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11월 4일의 대대적인 숙청작업은 반대파의 대거 숙청을 넘어서서 이미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이자 국방부 장관으로 경제와 국방을 손아귀에 넣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수사 및 체포를 포함한 광범위한 권력을 부여받은 반부패 최고 위원회를 이끌면서 내무와 사우디 군부의 3대축 중 유일하게 손아귀 밖에 있었던 국가방위부 (SANG)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왕세자 신분으로 국가의 주요 권력을 손에 넣은 GCC 국가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왕세자가 되는데 성공했습니다. 오만의 술탄 까부스가 국방, 외무, 재무 장관을 겸임하고 있는 전제 군주지만, 술탄 까부스는 아버지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술탄이 되고나서야 권력 독점이 가능했던 케이스라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아울러 사우디 왕가 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왕위 계승 방식을 철저하게 짓뭉개버린건 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악명높았던 종교경찰의 권한 약화, 사우디 내 콘서트 부활, 여성 운전 및 경기장 입장 허용, 홍해 일대 관광 프로젝트 및 대규모 미래 신도시 건설과 1979년 이전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의 회귀 선언 등 일련의 온건한 개혁정책을 통해 전세계를 놀래켰던 그는 이번엔 전혀 상반된 대대적인 숙청작업으로 다시한번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으며, 극단적인 일련의 이벤트들은 사실상 2013년까지 존재감도 없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자신이 벌여온 권력투쟁을 통해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될 자신의 통치 스타일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예고편이기도 합니다.


그가 보여준 스타일은 간단명료합니다. "나를 따르는 자 (70% 이상 젊은 국민)에겐 즐거움을, 반대하는 자 (기득권층을 위시한 반대세력)에겐 응징을!"


왕위를 향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권력투쟁기

위키피디아에도 항목이 없었을 정도로 존재감이 약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목을 받고 압둘라 전국왕파와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압둘라 전국왕이 사우드 왕가 내 소수파인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친권체제 강화를 노리던 통치 말기인 2013년 경부터입니다. 


서장- 압둘라 국왕의 친권강화 시도를 저지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다. (2013년~2015년 1월 23일)

압둘라 국왕이 술탄 전왕세제에서 살만 당시 왕세제로 이어지며 왕가 내 최다 파벌인 수다이리 세븐이 장악하고 있던 국방부에 자신의 우호세력을 갖추기 위해 지명했던 칼리드 빈 반다르 국방부 차관을 지명한지 6주만에 전격 경질시키게 만든 주인공이었거든요. ([정치] 압둘라 국왕, 칼리드 빈 반다르 국방차관을 지명 6주만에 전격 경질, 그리고 그 배경 참고) 

이 이벤트를 통해 의외의 타이밍에 주도권을 잡아 겉으로 보기에 모양새는 좋게 상대방을 숙청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그의 투쟁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1장- 압둘라 국왕의 타계에 맞춰 무끄린 왕세제와 무타입 국가방위부 장관을 제외한 압둘라 국왕파를 제거 (2015년 1월)

그리고 그의 스타일이 빛을 발한 것은 바로 압둘라 국왕이 타계한 2015년 1월 23일 새벽입니다. 비공식적으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가 주도하여 살만 왕세제파가 아들인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에 앞서 압둘라 국왕의 시신을 먼저 점유하는데 성공하면서 반전을 노렸던 압둘라 국왕파의 시도를 차단하고 살만 왕세제를 국왕으로 등극시켰죠. ([정치] 압둘라 국왕 타계, 사우디는 살만 국왕, 무끄린 왕세제 체제로... 참조) 압둘라 국왕과 살만 왕세제간의 서면 약속도 남아있어 무끄린 빈 압둘아지즈 부왕세제는 왕세제로 승격시키고, 예상 외로 그의 아들인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는 국가방위부 장관으로 남겨둔 채 앙숙이었던 압둘라 국왕의 심복 칼리드 알투와이지리 왕실법원장 포함하여 나머지 압둘라 국왕파는 요직에서 전부 경질시켜버렸습니다. ([정치] 살만 국왕의 신속한 체제 개편과 함께 재부상한 수다이리 7형제, 주목해야할 인물은? 참조)


2장- 무끄린 왕세제 사임, 자신을 부왕세제로... (2015년 1~5월)

살만 국왕이 취임하면서 왕세제가 된 무끄린 빈 압둘아지즈 왕자가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살만 국왕을 위시한 수다이리 세븐이 장악한 정부 내에서 그나마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줬던 우호세력인 압둘라 국왕파라고 해봐야 무타입 빈 압둘라 국가방위부 장관 밖에 없는데다 공식적인 서열과 상관없이 살만 국왕 체제의 실세가 되어가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무끄린 왕세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살만 국왕 취임 3개월만에 왕세제직을 스스로 물러나고,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는 부왕세제가 되면서 국왕에 오르기 위한 본격적인 시동을 걸게 됩니다. ([정치] 살만 사우디 국왕, 쌍무함마드 체제로 전면 개편한 후계구도의 의의 참조).    


3장- 커리어를 쌓기 위한 오랜 기다림, 그리고 왕세자로! (2015년 5월~2017년 6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는 자신이 벌인 예멘 알후씨 반군과의 전쟁으로 질퍽거리면서도 국내외적으로 광폭의 행보를 펼치며 서열 3위면서도 서열 2위인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보다 많은 주목을 받으며 사실상의 실세가 되어버리고야 맙니다. 미국 등을 위시한 주요 우방국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정재계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한편, 스포츠청과 엔터테인먼트청을 신설하면서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쌓아나가기 시작하고 비전2030을 발표하는 등 정적 숙청보다는 왕위 즉위를 위한 속성 트레이닝 코스를 밟게 됩니다. 실제로는 아버지를 국왕에 올려놓은 1등 공신이자 막후 실세지만,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혈기좋게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였을테니 말이죠. 워낙 무함마드 빈 살만 부왕세제가 마치 실세인양 나대는 통에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존재감을 잃으면서 주변의 시선에서 묻혀졌던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은 결국 왕세질에 오른지 약 2년 만인 2017년 6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정치]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자의 파격적인 왕세자 지명과 그 배경 참조).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이 이끄는 내무부의 핵심기능 중 하나인 범죄 수사 및 형사 사건 전반을 다루는 수사·기소국(BIP)을 국왕 직속으로 개편하면서 내무부의 세력을 약화시킨지 불과 4일만의 일이었습니다. 공개적으로는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이 새롭게 왕세제가 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에게 충성서약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등 평화로운 승계작업임을 보여줬지만, 며칠 뒤 서방 언론을 통해 이 이벤트 역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우드 왕가에서 유일하게 무장세력에 의한 암살미수 사건을 겪는 등 대테러전 전문가였던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도, 정작 자신의 사촌동생에겐 허무하게 당하면서 산전수전 겪으며 그동안 일궈왔던 권력을 잃게 되었죠.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가 대를 이어 유지해왔던 내무부와 자신이 이끄는 국방부에다 사우디 내 3대 군사세력 중 하나인 내무부 산하 국내안전보장국을 손에 획득하게 됩니다.


4장- 압둘라 국왕파의 종말과 잠재적 위험요소 숙청에 나선 숙청의 밤

지금까지는 앞에 있던 두 사람을 하나하나씩 제끼는데 성공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반감과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왕가 내 반대세력, 혹은 잠재적 위험요소를 덜어내야 할 부담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미 경험했던 것처럼 한두명을 숙청하는 건 크게 문제가 안되지만, 피를 흘리지 않고 보기좋게 다수의 위험요소를 색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인데다 잘못 처리할 경우 자신에게도 위험부담이 크니 말이죠. 그래서 택한 방식이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 누구도 지금까지 제대로 손댄 적이 없었던 왕가, 혹은 기득권 내 "부패와의 전쟁"입니다.


사우디는 세계 최고의 산유국이지만, 국민은 부유하지 못합니다. 오일붐을 타고 불과 50년새 10배로 폭증한 인구와 국토는 넓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구역은 생각만큼 넓지 않은 탓에 국가는 G20에 포함될 정도로 부유하지만, 정작 국민은 자가주택 보유율이 30%를 밑돌고 자가주택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최저생활 수준 이하의 허름한 집에서 거주할 정도인데다 니따까로 대표되는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사우디제이션 정책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10%를 상회하는 실업률로 인해 심각한 부의 불균형 상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반면 카타르는 국가 총생산은 사우디의 1/3도 안되지만, 자국민 수가 1/100도 안되기 때문에 오히려 높은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해봐도...) 더군다나 무함마드 왕세자 말처럼 청년 인구가 70%에 달하는 만큼 1900년대 후반 오일붐을 잘 타서 일찌감치 부를 장악한 극히 소수의 왕가 혹은 기득권층만 배부른 상황이거든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가 숙청했거나 숙청 중인 주요 인사들의 추정 재산규모만 봐도....ㅎㄷㄷ

이런 상황이다보니 부패척결을 빙자한 반대파 숙청 및 재산 압류는 상대적으로 빈곤하고, 이들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유가 하락으로 세입이 줄어드는 가운데 엄청난 자산을 국고에 환원시킬 수 있고, 개혁을 이끌고 있는 자신을 왕족이거나 기득권에 상관없이 죄를 범하면 가차없이 처단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로 인식시키면서 "부패와의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대대적인 숙청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셈입니다. (그 여파로 GCC 주식시장에서 60억달러가 빠져나갔을 정도로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가시화되자 부패한 개인에 대한 재산만 동결할 뿐, 법인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영업을 보장할 거라며 뒷수습에 나서긴 했지만요...)


하지만,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시작한 대규모의 검거작업이 공공연하게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린 숙청작업으로 인식되는 것은 그나마 신원이 확인된 인사들의 면면에서 확인됩니다. 재수사에 나서겠다고 밝힌 2009년 젯다 대홍수 사건과 2012년 메르스 창궐 사건과 연루된 인사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드러난 인사들은 압둘라 국왕파거나, 혹은 잠재적인 위험요소를 가진 위험인사거든요.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 (전 국가방위부 장관)- 무엇보다 압둘라 국왕파가 50년 넘게 장악했던 국가방위부 (SANG)을 마침내 수다이리 세븐으로 흡수하는데 성공하면서 압둘라 국왕파를 완전히 요직에서 제거하는데 성공! ([정치] 압둘라 사우디 국왕과 그가 위상을 강화시킨 자신의 권력 기반, 사우디 국가방위부 참조)

투르키 빈 압둘라 왕자 (전 리야드 주지사)와 칼리드 알투와이지리 (전 왕실법원장)- 2015년 1월 살만 국왕 즉위와 동시에 내쳐졌던 압둘라 국왕의 아들과 심복. 특히 칼리드 알투와이지리에 대해서는 [인물] 사우디를 움직이는 권좌 뒤의 실세, 압둘라 국왕의 최측근이자 왕실법원장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참조.

압둘아지즈 빈 파흐드 왕자 (체포에 저항하다 사살당했다는 설과 정부의 부인이 교차되며 생사가 묘연)- 압둘라 전국왕과 나이프 빈 압둘아지즈 전왕세제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의 아버지)의 우호세력.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 (킹덤 홀딩스 회장)- 사우디 최고의 부자이면서 왕권과는 거리가 멀지만 소신 발언을 꾸준히 해왔으며 바레인에 중도 성향의 뉴스채널을 개국했다가 방송내용을 문제삼은 바레인 당국에 의해 하루만에 폐국된 전례가 있음. 그의 아버지 탈랄 빈 압둘아지즈 왕자는 1962년에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자유왕자운동을 이끌었다가 왕권 계승서열에서 완전히 밀려났음.


압둘라 전국왕에 의해 부왕세제로 지명되어 왕세제라는 가시방석 위에 내려오면서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다시피했던 무끄린 빈 압둘아지즈 왕자는 이 소동 속에 자신의 아들 만수르 빈 무끄린 왕자를 원인불명의 헬기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비극적인 사고 후 살만 국왕이 무끄린 왕자에게 직접 애도를 표하고 체포에 저항하다 살해당한 왕자도 있다는 설로 곤욕을 치루던 사우디 정부는 이틀이 지나 동승했던 탑승객의 신원을 공개하며 공무 중 당한 불의의 사고라고 밝히면서 해외 도피를 시도하다 추락했다는 항간의 설을 부인하기에 나섰죠. 



사우디의 절친이기도 한 이웃 UAE 셰이크 사이프 빈 자이드 부총리 겸 내무부 장관과 셰이크 압둘라 빈 자이드 외교국제관계부 장관을 대표로 하는 조문단을 보내 무끄린 왕자를 위로하는 것으로 보아 만수르 빈 무끄린 왕자의 죽음은 공무 수행 중 순직으로 처리하려는 모양새입니다. 특히, 사살설이 돌고 있는 압둘아지즈 빈 파흐드 왕자와 비교해봐도...요즘 같은 상황에서 해외도피를 시도하다 죽은 거라면 이런 훈훈한 장면이 보여지진 않겠죠. 

하지만, 이 또한 사우디 정부의 의도와 달리 이 역시 반대파들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라는 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컨트롤 하에 있는 군이 만수르 빈 무끄린 왕자 일행이 타고있던 비행기를 격추시켰고, 반항하면 이렇게 묻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시범 쇼케이스랄까요.


대규모 숙청작업과 동시에 제정된 테러방지법

사우디 정부는 법 위에 그 누구도 있을 수 없다며 시작한 시끌법적하게 시작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으로 인해 묻힌가운데 그 다음날 무시하지 못할 법을 하나 발표했습니다. 테러와 연루된 죄질에 따라 최대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새로 강화된 테러방지법이 섬뜩한 이유는 "국왕 (및 왕세자!!!)를 공공장소에서 비방하거나 모욕하다 적발될 경우 징역 5~10년형에 처할 수 있다"는 모욕죄 조항이 추가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왕권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벌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추가로 마련한 셈입니다.

  


11월 4일 숙청의 밤을 통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경제, 사우디 군부 완전체 (사우디군+국내안전보장국+국가방위부의 삼위일체), 내무부의 핵심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합법적으로 잠재적 위험인사들을 처단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비난하는 반대세력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근거까지 확보하면서 전제군주로 가는 길을 성공적으로 닦았습니다. 아울러 테러방지법에 국왕/왕세자 모욕죄를 추가한 것은 앞으로 그가 추진해나갈 정책이 사람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살 수 있는 충격과 공포의 정책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공식적인 부인 속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이스라엘 방문설 보도 등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설이 이스라엘과의 전향적인 관계 재정비죠. 


뜬금없는 타이밍에 주도권을 잡아 상대를 장악하는 방식이 권력투쟁에서는 큰 효과를 보고 있는 것과 달리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게 위협감을 느끼고 있는 사우디 왕자들에게 정치적 망명지를 제공하겠다며 조롱하고 있는 알후씨 반군과의 전쟁과 카타르 고립사태에서 보듯 대외 정치에서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과연 그는 다음엔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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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C/GU/사우디2015. 5. 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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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서열 2위 왕세질?제?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 서열 3위 부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



사우디 살만 국왕은 취임 3개월만에 대대적인 개각을 통해 무끄린 왕세제를 친형 나이프 왕자의 아들이자 내무부 장관 겸 부왕세질?자?였던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로, 자신의 아들이자 국방부장관 겸 왕실법원장이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를 부왕세자로 전격 교체함으로써 노인정화 되면서 영속성에 의구심을 자아냈던 후계 구도를 파격적으로 재개편했습니다. ([정치] 살만 국왕의 신속한 체제 개편과 함께 재부상한 수다이리 7형제, 주목해야할 인물은? 참조) 국부 압둘 아지즈 국왕의 첫 손자 세대 후계자 및 차기 후계자. 


살만 국왕 취임 당시부터 강조해왔던 영속성은 압둘라 국왕의 정책기조를 이어가는 것이라기 보다 왕가 내 소수 파벌인 압둘라 국왕의 통치 10년간 숨 죽여왔던 수다이리 세븐 세습체제로의 영속성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조치입니다. 이는 압둘라 국왕의 장례식이 치뤄지기도 전에 부분 개각을 통해 무끄린 왕세제와 무타입 빈 압둘라 국가방위부 장관을 제외한 압둘라 국왕의 측근을 제거하면서부터 예고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압둘라 국왕과 살만 왕세제간 사우디 왕가 내 최초의 서면 합의로 부왕세제에 올랐다가 살만 국왕 부임과 동시에 왕세제에 올랐던 무끄린 왕세제는 사직서를 쓰고 모양새 좋게 물러나기는 했지만, 예멘인 모친을 둔 소수파 중의 소수파인 그로서는 자신의 우호세력이었던 압둘라 국왕의 측근들이 다 없어진 상황에서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우디의 후계구도는 지난 2011년 10월부터 2012년 6월에 걸친 8개월간 살만 국왕의 친형이기도 했던 두 명의 왕세제 술탄 왕자와 나이프 왕자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사우디 정치를 논하는데 있어 잠재적 불안요소이자 세대교체가 화두로 떠오른 바 있었습니다. 후계 구도가 압둘 아지즈 국왕의 아들 세대에서 손자 세대로 언제, 어떻게, 누가 첫 주자가 될 것인가가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압둘라 국왕은 세대 교체 대신 역시 고령의 살만 왕자를 왕세제로 지명했었지만, 그가 국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조치를 잇달아 취했습니다. 살만 왕세제가 쥐고 있던 사우디 군부 내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측근을 차관에 임명했다던가, 뜬금없어 보이는 부왕세제 자리를 명문화시켜 역시 측근인 무끄린 왕자를 부왕세제에 앉히고 부분 개각을 통해 자신의 아들과 측근에 요직을 맡기면서 친정체제를 강화하려고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두 가지의 변수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첫째는 고령의 압둘라 국왕에게는 친정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고, 살만 왕세제에게는 어리지만 자신의 아들이자 왕세제실 법원장이었던 무함마드 왕자가 있었습니다. 재단 설립 등 사회활동에 주력하면서 사우디 정치에서는 미미한 존재였던 무함마드 왕자는 왕세제실 법원장을 맡으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었습니다. 


사우디 군부 내 압둘라 국왕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그가 지명했던 차관을 기어코 쫓아내는데 성공했고, 압둘라 국왕의 사망 즈음에 펼쳐졌던 캍리드 투와이지리 전 왕실법원장으로 대표되는 압둘라 국왕파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니까요. 부왕세제가 되면서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압둘라 국왕의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 칼리드 투와이지리를 왕실법원장에서 내쫓고 자신이 왕실법원장을 겸하면서 사우디 정치에서 살만 국왕 체제의 최대 수혜주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현재 세계 최연소 국방부 장관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치룬 예멘 공습작전 (Descive Storm)의 성공적인 목표 달성은 경력이 일천하다는 불안감을 해소시키기에 충분한 덤.


무함마드 왕세질과 무함마드 부왕세자로 이어지는 쌍무함마드 후계체제는 향후 몇십년간 수다이리 파벌의 세습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후계구도를 구축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첫째, 확 젊어진 후계 구도.

79세의 살만 국왕은 고령에다 알츠하이머 증세를 앓고 있는 등 건강문제도 안고 있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번 후계구도 개편을 통해 50대의 왕세질과 30대의 부왕세자를 임명하면서 향후 몇 십년간 안정적인 체제를 순식간에 구축해 버렸습니다. 압둘라 국왕 시절에도 이를 추진하고자 했지만, 소수파인 그로서는 수다이리 세븐의 삼형제 (술탄, 나이프, 살만)를 확 제끼고 아들 세대로 넘길만한 여력이 없었으니까요.


둘째, 잠재적 불안요인 제거

압둘라 국왕이 수다이리 세븐 삼형제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들이 사우디 군사력의 3대축인 국방부와 내무부 산하 치안유지군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예군인 국가방위군 (SANG)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압둘라 국왕으로서도 3대축의 두 축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이 돌변할 경우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테고, 사우디 군부에 자신의 측근을 심으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이번 후계구도 개편을 통해 자신의 가족이기도 하지만 알까에다 등 극단주의 테러조직들과 10년 이상 싸우며 내공을 키워 온 치안유지군의 수장인 내무부 장관인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와 성공적인 예멘 공습작전을 수행한 국방부 장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를 서열 2, 3위로 끌어 올리면서 자신들을 향한 군사적 쿠데타의 가능성을 무효화시킨 것이 수다이리 파벌 세습 체제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성공적인 예멘 공습작전 수행과 군, 치안 수장들의 승진을 기념하여 사우디 군부와 치안요원들에게 한달치 급여를 보너스로 제공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나간 것은 덤. 여기에 개각 발표 다음 날 발표한 칙령을 통해 왕실법원과 왕세제실법원을 왕실법원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친척이지만 친족은 아닌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 측근에 권력 다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니어스급 참모가 나올 가능성을 원천봉쇄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입니다. 


살만 왕세제가 압둘라 국왕의 견제를 뚫고 국왕에 오르기까지 왕가 내 권력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 같은 우수한 책사가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에게도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죠....


사우디 왕가의 최대 파벌이자 7명의 왕자 중 2명의 국왕 (5대 파하드, 7대 살만)을 탄생시킨 수다이리 가문으로의 세습체제를 공고히 하고 향후 몇 십년간 정치적 불안요인을 단 한번에 일소한 것이 이번 후계구도 개편의 백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살만 국왕은 안정적인 정지기반 하에서 산업 다각화와 사우디인 실업문제 해소라는 경제 개혁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대적인 개각에 이어 세계최대석유회사인 아람코를 석유 중심의 회사에서 벗어나는데 초점을 맞춘 구조개편안을 진행하기 시작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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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C/GU/사우디2015. 1. 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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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국왕의 타계로 왕위에 오른 살만 사우디 국왕은 취임 후 첫 대국민 TV연설을 통해 전임 압둘라 국왕의 업적을 기리고 사우디가 세워진 이래 옳은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왔다면서 "안정"과 "통합"이라는 기치 하에 점진적 개혁을 추진해 온 압둘라 국왕의 정책을 계승해 나갈 것임을 약속하며 큰 정책변화는 없을 것임을 암시했습니다. 뭐, 확 뜯어고칠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긴 합니다만...


하지만, 정책수행의 연장선상에서 기존의 장관들은 큰 변화없이 그대로 임기를 보장할 것이라고 밝힌 와중에도 왕권 승계와 연계된 요직에 자기 사람을 앉히는데 성공하면서 왕실 내 최대 파벌인 수다이리 7형제를 약화시키고 소수파지만 우호세력을 모아 친권 강화를 도모했던 압둘라 국왕의 뜻은 자신의 장례식이 치뤄지기 전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무함마드 빈 나이프 부왕제 겸 내무장관)


부왕세제 자리를 명문화할 당시 압둘라 국왕과 서면합의한대로 무끄린 부왕세제를 일단 취임 즉시 서열 2위인 왕세제로 앉히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몇시간 뒤 이례적으로 빨리 공표한 서열 3위인 부왕세자 자리에 압둘라 국왕의 아들인 국가방위부 장관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가 아닌 살만 국왕의 친형 고 나이프 왕세제의 아들이기도 한 1959년생의 내무장관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를 임명하면서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살만 국왕 역시 고령이면서도 알츠하이머와 치매를 앓고 있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불명확한 후계구도에 대한 주위의 우려를 일단 불식시키기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그 덕에 무함마드 왕자는 압둘아지즈 국왕의 첫 손자세대 왕자이자 수다이리 7형제 아들세대로는 처음으로 왕권 승계를 가시권 안에 두게 되었지만요.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는 압둘라 국왕이 자신의 권력기반이었던 국가방위군을 국가방위부로 승격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인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를 장관급으로 격상시키기 7개월 전인 지난 2012년 11월 내무차관에서 내무장관으로 승진하면서 압둘 아지즈 손자 세대 왕자들 중 첫 요직에 오르며 차세대 왕위 계승에 선두주자로 나선 바 있습니다. ([정치] 무타입 왕자의 장관 승격으로 본 유력 차기 승계후보들... 참조) 그는 내무부 산하 국내치안보장국을 이끌고 2003년 이후 사우디 내 테러와의 전쟁에 선봉장으로 나서면서 카리스마를 발휘한 바 있으며, 이 와중에 사우드 왕실에서 처음으로 반군 세력에게 보복테러를 당한 바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 사우디 왕실 내의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정치] 새 내무장관에 무함마드 왕자 임명, 차세대 왕위 계승 선두주자로 나서! 참조)


뜻밖의 부왕세자 확정도 있지만, 이번 인선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될 인물은 살만 국왕의 아들이자 왕세제실법원장 겸 국방장관 개인 보좌역을 맡고 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입니다. 이번 개편을 통해 국방장관과 왕실법원장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영향력과 입지를 급부상시킨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고 할까요? 


(무함마드 빈 살만 국방장관 겸 왕실법원장)


아버지 살만 왕세제의 충실한 보좌역이었던 29세의 무함마드 왕자는 아버지의 국왕 부임과 함께 국방장관이 되면서 고령화 된 사우디 장관들 중 최연소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간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그는 국방장관 개인보좌역이었던 당시 압둘라 국왕이 수다이리 7형제가 장악하고 있는 사우디 군부에 자신의 우호세력을 심기 위해 국방차관으로 임명했던 칼리드 빈 반다르 왕자를 6주만에 전격 경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정치] 압둘라 국왕, 칼리드 빈 반다르 국방차관을 지명 6주만에 전격 경질, 그리고 그 배경 참조) 



아울러 살만 국왕은 압둘라 국왕의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밝히면서도 왕세제 당시 왕세제실법원장이었던 무함마드 왕자를 국방장관에 이어 왕실법원장으로 승진시키면서 고 압둘라 국왕의 충실한 집사이자 개혁정책 추진의 막후 인물로 보수적인 종교세력들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져 왔던 칼리드 알투와이지리 왕실법원장을 몰아내며 압둘라 국왕의 그림자를 지워내는데도 성공했습니다. ([인물] 사우디를 움직이는 권좌 뒤의 실세, 압둘라 국왕의 최측근이자 왕실법원장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참조)


이로서 살만 국왕으로 대표되는 왕실 내 최대 파벌인 수다이리 7형제는 압둘라 국왕의 장례식이 치뤄지기도 전에 압둘라 국왕의 기세에 밀려 그동안 약화되었던 권력을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강화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고 압둘라 국왕의 장례식

(이맘 투르크 빈 압둘라 모스크에서의 장례식)


상대적으로 왕실 내에서 소수파인 자신의 친권 강화을 위해 애썼으나 그 뜻을 이루기 전에 타계한 압둘라 국왕은 타계 후 열 몇시간 만에 이맘 투르크 빈 압둘라 모스크에서 장례식을 치룬 후 알오드 공동묘지 내 표식없는 무덤에 묻히며 세상과 작별을 고했습니다. ([문화] 무슬림의 죽음, 새롭고 영원한 삶에 이르는 교량 참조)



(알오드 공동묘지에 묻힌 압둘라 국왕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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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C/GU/사우디2015. 1. 2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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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 전 사우디 국왕)


사우디 왕실법원은 지난 12월 리야드에서 GCC 정상회담을 긴급 소집하여 3월부터 계속되어 오던 카타르와의 갈등을 종식시킨 후 건강진단을 이유로 입원했으나 폐렴을 앓고 있었던 90세의 압둘라 국왕이 금요일 새벽 1시 타계하였으며, 왕실서열에 따라 서열 2위이자 승계 1순위인 살만 왕세제 겸 국방장관이 사우디의 새로운 국왕에 취임했고, 살만 국왕은 취임 즉시 충성 위원회의 승인에 따라 무끄린 부왕세제를 왕세제로 지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왕실 내 소수 세력이지만 국가방위부 (SANG)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정치] 압둘라 사우디 국왕과 그가 위상을 강화시킨 자신의 권력 기반, 사우디 국가방위부 참조)2005년 8월 취임 이후 보수적인 종교세력과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 사이에서 이슬람의 성지인 그랜드 모스크의 확장과 더불어 점진적인 개혁정책과 국가정체성 확립에 힘써왔던 고령의 압둘라 국왕은 그동안에도 잦은 병치례를 치뤄왔기에 얼마나 자리를 지킬 것인가가 관건이었으며, 이복동생이자 왕실내 최다 파벌인 수다이리 7형제 중 한 명인 79세의 살만 왕세제는 최근 중요 외부행사에서 압둘라 국왕을 대행해왔습니다. 


(살만 새 사우디 국왕)


30여명이나 되는 압둘 아지즈 국왕의 아들 중 그를 가장 닮은 것으로 알려진 살만 사우디 국왕은 1935생으로 리야드 주지사를 거쳐 2011년 친형 술탄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 2012년 6월 친형 나이프에 이어 왕세제에 올랐으며, 왕세제까지는 올랐으나 먼저 사망하여 국왕에 오르지 못한 두 명의 친형 술탄과 나이프를 대신하여 국왕이 되었지만, 역시 79세의 고령인데다 건강하지는 않기에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울러 그간 안정적인 관리 능력으로 압둘라 국왕의 노선을 따라왔던 그가 내부적으로는 여성운전 허용 등 늘어나고 있는 국민들의 개혁요구와 보수적인 종교세력과의 갈등, 외부적으로는 이집트, 시리아, IS 등 더욱 첨예하게 급변하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국왕이 된 지금 어떤 행보를 걷게 될지도 관심사입니다.


(무끄린 사우디 왕세제)


한편, 국부 압둘 아지즈 국왕의 살아있는 가장 어린 아들인 무끄린 새 왕세제는 1945년생으로 압둘라 전 국왕의 우호세력으로 알려져왔으며, 예멘인 모친의 혈통 등으로 인해 왕실 내 우호세력은 많지 않지만 하일주와 매디나주 주지사에 이어 정보국장을 역임한 후 지난 2014년 3월 당시 압둘라 국왕과 살만 왕세제의 서면 합의 하에 공석이었던 부왕세제로 전격 지명되면서 서열 3위로 급부상했었습니다. (한 중동지역 전문가는 이 과정에서 압둘라 국왕과 왕실 내 최대파벌인 수다이리 7형제의 수장인 살만 당시 왕세제의 서면합의는 사우디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기에 왕실내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유효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습니다./ 

[정치] 사우디, 제2부총리 무끄린 빈 압둘아지즈 왕자를 부왕세제로 지명! 참조) 살만 국왕이 취임 즉시 왕세제로 무끄린 부왕세제를 지명한 것은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이에 대한 우려와 논란을 일단락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압둘라 전 국왕의 장례식은 오늘 저녁에 행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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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랍지역 전문 블로거 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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