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 왕실법원은 통치자 술탄 까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가 1월 10일 서거함에 따라 3일간을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40일간 조기를 게양한다고 공식 빌표했습니다. 향년 79세. 오만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통치자인 술탄 까부스는 1970년 7월 2일부터 50년 가까이 오만을 통치하며 오만의 근대화를 이끌어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내쫓고 오만을 건국하기까지
무스카트와 오만의 제13대 통치자였던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와 셰이크 마이준 알메샤니의 외동아들로 1940년 살랄라에서 태어난 그는 살랄라에서 중등교육까지 마친 후 16세에 영국의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에 있는 한 사립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후 20세에 영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한 후 영국군에서 1년간 복무하고 모든 교육을 마친 후 1966년 오만으로 돌아옵니다.
(술탄 까부스의 아버지 술탄 사이드)
하지만, 그의 아버지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을 다녀온 아들들에게 공직 경험을 쌓게하며 후계자 양성에 나섰던 다른 이웃나라 통치자들과 달리 영국에서 군과 행정 등 다양한 경험을 쌓고 온 그를 키우기는 커녕 살랄라에 있던 술탄 궁전에 사실상 가택연금을 시키고, 자신의 고문역들이 때때로 해주는 브리핑 외에는 공무로부터 철처히 고립시켰습니다. 술탄 사이드는 그뿐 아니라 그의 인간관계도 고문역들의 자녀, 혹은 소수의 외국인 등 왕실에서 엄선한 소수의 인원으로 제한시키고, 그의 아들이 국가발전계획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려던 술탄 사이드의 행보는 이미 해외에서 경험치를 쌓아온 까부스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는 외국인 지인들의 지원 속에 나라를 바꾸겠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1970년 MI6와 영국군 등 영국의 지원을 받아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술탄 사이드를 축출하고 권력을 잡은 뒤 국가명을 무스카트와 오만에서 정치적 통합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오만 술탄국 (Sutanate of Oman)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란과 각별해지게 된 계기, 도파르 반란
그는 취임 6년 만인 1976년에 아버지때부터 13년간에 걸쳐 치뤄진 도파르 반란을 완전 진압하는데 성공하면서 정치적인 불안요소를 없애고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을 이끌게 되는데, 오만 내전이라 불리우는 이 전쟁에서 술탄 까부스는 오히려 이웃 걸프국가들보다 팔레비 샤가 이끄는 이란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형제간의 분쟁은 인정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쿠데타는 탐탁치 않게 여긴 사우디와 UAE는 체면치레할 정도로 미미한 지원을 한 반면, 오만 정규군과 비정규군을 포함한 병력 12,000여명의 3분의 1 수준인 4천명의 이란 황제군을 파병한 이란은 오만보다 몇 배의 희생을 감수하며 술탄 까부스가 반란군을 진압하는 일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오만군 전사자가 187명, 부상자가 559명이었던 반면, 이란군은 오만을 지키기 위해 전사자 719명, 부상자 1404명으로 파병 병력의 절반 이상을 희생해야만 했으니까요. 자신의 정치적 위기에서 가장 강력한 우군이자 혈맹이 되어준 이란에 대한 각별한 감정은 팔레비 정권이 무너지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뀐 지금까지도 이어져셔 GCC 내에서 가장 친 이란 국가이자, 지금은 파기된 미국-이란간 제네바 협정의 막후 중개자로서 술탄 까부스가 역할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거셈 술레이마니 암살 사건 이후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고조된 지금이야말로 그의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보였는데;;;
기본적인 인프라도 없었던 낙후된 빈국에서 근대화된 국가로
술탄 까부스는 술탄이 통치하는 절대 왕정제 국가를 세웠으며, 다른 국가들과 달리 자신의 생일인 11월 18일을 내셔널 데이로, 그의 취임일인 7월 24일을 르네상스 데이 휴일로 지정했습니다. 그의 취임일을 르네상스 데이라 불리울만한 이유는 그의 취임 당시 12병실, 포장도로 1.6km, 남자 초등학교 3개교, 라디오 청취 금지, 운전 금지, 매일 밤 닫히는 무스카트 게이트, 야간 통행시 랜턴 필수 지참 등 인프라가 전무하다시피했던 낙후된 나라를 근대화의 이끈 첫 날이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발견된 석유 수입이 국가 인프라 구축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고, 자체 통화 없이 인도 루피와 마리아 테레지아 탈러가 통용되었던 나라에 국가 통화인 오만 리얄을 만들면서 경제 발전에도 나섰습니다.
GCC 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한 오만의 외교
국가를 근대화시키고 내치를 다지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모두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 누구의 적도 되지 않는다"는 외교 정책을 앞세워 필요할 때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해 왔습니다. 특히, 도파르 반란 당시 옆 나라인 사우디, UAE 보다 호르무즈 해협 너머 파병한 이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던 것이 그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만은 반 이란 정서가 강한 사우디와 UAE가 한 목소리를 내는 GCC 내에서도 이란 관련 문제만큼은 독자적인 입지를 견지해왔기에 반 이란으로 뭉치자는 사우디의 걸프연합 구성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정도였죠.
2013/12/08 - [GCC/GU/GCC/GU] - [GU] 오만 외무장관, 오만은 걸프연합 결성에 동참하지 않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의 조용한 외교정책은 GCC 내에서 그 누구보다 이란과 가까운 자신들의 독자적인 행보가 마땅치 않을 사우디와 UAE마저도 적대적 관계로는 만들지 않아서 딱히 각별하진 않더라도 오히려 없었던 사우디-오만 육로가 개통되는 등 큰 잡음없는 관계를 유지해오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사막 엠티쿼터에 막혀 이웃 국가이면서도 UAE를 우회하지 않는 한 육로로 직접 갈 수 없었던 사우디와 오만이 어마무시한 양의 사막 모래를 파내어 고속도로를 개통시킨 것이 불과 1~2년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UAE는 술탄 까부스의 서거를 함께 애도하는 차원에서 토요일부터 3일간을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공공기관에 조기를 게양하며, 토요일 저녁 마그립 예배 시간에 추모 예배를 드릴 것을 명하며 그에 대한 예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카타르가 자신들의 역내 영향력을 높이겠다며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외교, 미디어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20년 넘게 펼쳐온 전방위적인 행보를 문제삼아 사우디, UAE와 함께 몇 년째 외교분쟁 중인 것과는 다르게 말이죠. 특히 청구서의 첫번째 항목이 이란과의 외교 단절을 내세운 것을 보면, 정작 카타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친 이란 노선을 걸은 오만에게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2017/06/24 - [GCC/GU/GCC/GU] - [분쟁] 카타르가 단교 사태 종식의 전제조건으로 사우디, UAE로부터 받은 청구서 내역
그리고... 오랜 투병생활 끝 술탄 까부스의 서거
이러한 술탄 까부스도 2015년부터 대장암으로 투병생활을 시작해왔으며 수차례에 걸쳐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특히 2016년에는 치료차 해외에 머무느라 자신의 생일이기도 한 내셔널 데이에 처음으로 불참하기도 했었죠. 지난해 말 치료차 간 벨기에 UZ Leuven에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은 후 자신이 일군 고국에서 죽겠다며 12월 14일에 오만으로 귀국했으며, 술탄의 건강이 안정 상태라던 12월 말일의 왕실법원 발표가 무색하게 결국 1월 10일 서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투병과 함께 본격화된 오랜 의구심, 과연 누가 오만의 차기 통치자가 될 것인가?
50년 가까이 나라를 이끌어 온 최장수 통치자인 술탄 까부스가 서거한 후 생긴 모든 이들의 관심사는 과연 누가 오만의 차기 통치자가 될 것인가였습니다. 이는 전임 압둘라 국왕 재임 말기 워낙 후보군이 많이 예측하기 힘들었던 사우디와는 다른 이유에서 생긴 의문이었고, 걸프지역에서는 특이한 케이스여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공식 후계자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오만 정치 시스템 상 술탄에게 사실상의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절대 왕정이라도 분야에 따라 부처별 장관을 따로 두고 있어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권력싸움을 벌이기도 하는 이웃 걸프국가들과 달리 오만의 경우에는 술탄이 통치자 겸 군통수권자이자 국방장관, 외교부 장관, 중앙은행장을 겸직하는데다 법관을 임명하고 사면 및 형량을 부여할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으니까요. 견제와 균형은 커녕 기본적인 권력 분립이란 개념이 없는 오만에서 모든 권한을 손에 쥐고 있는 술탄은 유사시를 대비해 후계자를 일찌감치 지목하고 키워야 할 필요성이 더더욱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서거할 때까지도 차기 술탄 계승자로 지명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였을까요?
술탄 까부스는 원체 외동아들이라 형제도 없었던데다 첫번째 부인이자 사촌인 사이다 카밀라와 1976년 결혼했다가 자녀없이 3년 만에 이혼한 것으로 알려진 뒤에는 여러 차례 결혼을 한 다른 당대의 걸프국가 통치자와 달리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왔기에 핏줄도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서 보좌하는 사촌들이 있었음에도 이상하리만큼 차기 왕위 계승자를 공석으로 비워뒀었으니까요. 여러 부인들 중 아들을 많이 낳은 부인이 큰 목소리를 내온 사우디 (살만 국왕의 모친 훗사 빈트 아흐메드 알수다이리), UAE (셰이크 무함마드 아부다비 왕세제의 모친 파티마 빈트 무바라크 알꺠트비), 카타르 (통치자 셰이크 타밈의 모친 모자 빈트 나스르 알미스나드) 등과 달리 자녀없는 이혼으로 끝난 단 한 번의 결혼은 여러 루머를 낳기도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형제는 물론이거니와 치맛바람을 펼칠 부인도, 공식적인 차기 술탄 계승자도 없는 상황에서 술탄이 서거하게 된 셈이니까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술탄의 서거로 인해 발생한 권력 공백.
공식 후계자를 지명하지는 않았으나, 차기 통치자를 지명한 유서를 남겨 둔 술탄 까부스!!!
1996년 제정된 오만 법에 따르면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통치자가 서거했을 경우 국방 평의회를 통해 술탄 사후 3일 내에 다음 후계자를 발표하게 되어 있으나, 술탄 까부스가 죽기 전 다음 통치자를 지명한 유서를 비밀리에 남겨둔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방 평의회가 어떤 선택을 할지 귀추가 주목되었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3일 동안 통치자가 없는 상황에서 술탄 선정 과정을 거칠 것인가?
(오만 통치자 선정을 위한 국방 평의회 긴급 회의)
왕실 가족 협의회가 국가 기본법 6조에 따라 국방 평의회에 그의 유서를 개봉할 것을 위임하기로 결정하면서 술탄 까부스의 장례식을 치루기 전인 11일 아침 일찍 알부스탄 궁전에서 국방 평의회와 왕실 가족 협의회가 다같이 참석한 가운데 술탄 서거에 따른 긴급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국방 평의회는 모든 참석자가 보는 앞에서 그의 유서를 낭독한 후 그의 유지에 따라 사촌 하이쌈 빈 타릭 알사이드 문화유산부 장관을 오만의 2대 술탄으로 지명한다고 발표하고 취임식을 가지면서, 술탄의 부재로 인한 권력 공백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택했습니다.
(차기 통치자를 지명했다는 술탄 까부스의 유서를 개봉하고 있다.)
예상 밖 등장! 오만 2대 술탄 하이쌈 빈 타릭 알사이드 취임!
오만의 2대 통치자가 된 술탄 하이쌈 빈 타릭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는 1954년 8월 11일생으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의 Foreign Service Programme (FSP)를 졸업하고 펨브로크 칼리지에서 석사를 받았습니다. 귀국 후 1980년대 초반에는 오만축구협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외교부 차관 (1986~1994)과 외교부 사무총장 (1994~2002)을 맡으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문화유산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현재는 미래의 오만을 준비하는 오만 2040 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 전부일 정도로 사람들이 주목하는 오만 정치의 핵심 인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쌓았던 인맥을 바탕으로 술탄 까부스의 특별 보좌역으로 오만 정부를 대표하는 외교 사절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오곤 했습니다.
오만의 새로운 통치자 술탄 하이쌈 빈 타릭 알사이드는 자신을 2대 통치자로 지명한 평의회원들 앞에서 "오만을 개발 및 발전시킨 고 술탄 까부스의 숭고한 의지를 받들어 앞으로 나가겠다."는 취임 일성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술탄 하이쌈 빈 타릭 알사이드는 정부 내에서 다수의 공직생활을 했으며 오만인들 사이에선 신망이 두터운 인사로 술탄 까부스가 총리를 겸직하기 전 첫 총리이자 그의 옛 장인어르신이었던 타릭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의 세 아들 아스아드, 쉬합과 함께 3명의 유력 차기 통치자 후보에 포함되었으면서도, 아스아드에 밀려 차기 통치자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기에 술탄 까부스의 유언은 예상 밖의 지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공식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2017년 3월 술탄 까부스가 아스아드 빈 타릭 알사이드 (1954년 6월 1일생/ 술탄 하이쌈 빈 타릭 알사이드의 2개월 이복형)를 부총리 겸 술탄의 특별 대리인에 지명한 것이 사실상 그를 차기 통치자로 지명하기 위해 힘을 심어주기 위한 인사조치가 아니었을까라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보란듯이 깨버렸으니까요. 이에 비해 하이쌈은 오랫동안 문화유산부 장관을 맡고 있지만 아무래도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부처이고 쉬합은 퇴역한 해군 지휘관이었을 뿐이니가요.
술탄 까부스는 사촌이자 자신처럼 영국 육군사관학교 후배이기도 한 아스아드 빈 타릭 알사이드 대신 옥스포드 출신으로 외교쪽에서 경험과 인맥을 쌓은 그를 택하면서 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된만큼 더더욱 복잡해진 역내 분쟁과 국제정세 속에서 그의 외교감각을 높이 산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술탄 하이쌈이 이끌 오만의 행보가 사뭇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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