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C/GU/사우디2018. 10. 1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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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언론계에서도 유명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쇼끄지가 터키인 약혼녀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맡기고 만약 네시간 뒤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측에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긴채 결혼 준비를 위해 신청했던 서류를 떼러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갔다가 사라진지 10일이 넘었습니다. 터키와 반 사우디 언론들은 사우디가 시체 해부전문가를 포함한 15명을 전세 비행기편으로 이스탄불에 입국시켜 영사관 내에서 그를 살해한 후 시신을 분해하여 리야드로 돌아갔다며 사우디 정부에 의한 암살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사우디측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말 카쇼끄지는 자신의 민원을 해결하고 영사관을 떠났으며 오히려 그의 실종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가족들도 모른다는 약혼녀, 목격자, 신고자 등이 터키 및 카타르측과 연루된 인사들이고 그의 살해범으로 주장하고 있는 15명은 단순한 방문객일 뿐으로 그들의 주장은 사우디 정부를 음해하기 위한 음모론이라고 맞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우디 정부의 암살설을 주장하는 터키 및 카타르 중심의 반 사우디 성향의 언론들도 군불만 지필뿐 명확한 물증을 제시하고 있진 못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사우디 정부의 반박 역시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 궁색한 변명으로 여겨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들이 비판적인 언론인 살해범이라는 프레임을 깨고자 한다면 자말 카쇼끄지가 무사히 영사관 밖을 빠져 나갔다는 CCTV 영상, 혹은 그가 살아있는 모습을 공개해야겠지만, 현 상황에서 사우디는 가장 기본적인 그의 생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제시할 수도 없을테니 말이죠. 그의 실종 미스테리가 길어지면서 자말 카쇼끄지 쇼크는 오히려 사우디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해 사우디가 홍해 관광 프로젝트를 발표했었을 당시 가장 먼저 투자하겠다고 나선 버진 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CEO가 투자철회를 선언했고, 역시나 지난해 첫 컨퍼런스에서 야심찬 초대형 미래 신도시 네옴 발표로 주목을 받아 올해엔 무슨 발표가 이어질지 화제를 모았던 제2회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에 참가하기로 한 언론, 업체들이 잇달아 불참을 선언하여 개최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으로 이어졌으니까요.


실종된 자말 카쇼끄지는 어떤 사람이며, 그의 사우디는 어떻게 변해왔던 것일까요?



자말 카쇼끄지의 가문과 이력

자말 카쇼끄지는 부유한 사우디 가문 출신입니다. 아랍어 이름으로는 낯선 카쇼끄지라는 이름은 그의 가문이 터키 카이세리 지방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카쇼끄지는 터키어로 "스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Kaşıkçı"에서 나왔다고 하네요.) 외과의사였던 그의 할아버지인 무함마드 카쇼끄지가 사우디 여성과 결혼하고, 오늘날의 사우디를 세운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의 개인 주치의가 되면서 카쇼끄지 집안은 사우디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친척 중엔 유명한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한 명은 삼촌으로 이란 콘트라 스캔들에 깊숙히 관여한 1980년대 당시 40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억만장자이자 유명한 무기 거래상이었던 아드난 카쇼끄지이고, 또 한 명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연인이었으며 파리에서 발생한 의문의 교통사고로 함께 사망했던 사촌 도디 파예드입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이력을 한번 살펴보죠.

- 1958년 10월 13일 사우디 메디나에서 출생

- 1970년대 고등학교까지 사우디에서 공부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짐.

- 1982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1983~1984년 티하마 서점 지역 총괄 매니저

- 1985~1987년 사우디 가젯트 (영자 신문)와 자매지 오카즈 (아랍어 신문) 통신원

- 1987~1990년 앗샤르끄 알아우사뜨, 알마잘리아, 알무슬리문 등 여러 매체의 기자

- 1991~1999년 알메디나 주필 겸 편집장 대행

아프가니스탄, 알제리, 쿠웨이트, 수단, 중동 지역 특파원 역임

사우디 정보국 ([사회] 사우디의 국가정보원, 사우디 정보국 "무캇바라" 참조)을 위해서 일했으며, 이란 아프가니스탄 당시 미국과도 일한 것으로 추정. 이 과정에서 자말 카쇼끄지는 오사마 빈 라덴과 친분을 맺고 수차례 인터뷰를 땀과 동시에 무장세력으로 성장한 그와 사우디 왕가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중재역할을 맡으면서 그에게 폭력행위를 중단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9/11 사태 이후 두 사람의 친분은 끊어짐. 사우디 왕가와 오사마 빈 라덴의 한때 친밀했던 거래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유일한 비사우드 왕가 출신 사우디인이 되었음.

- 1999~2003년 아랍뉴스 부편집장

- 2003년 알와딴 편집장. 와하비즘의 아버지 이븐 타이미야를 비평하는 칼럼을 실어 사우디 정보부에 의해 52일만에 해임. 이 해임건을 계기로 서구 매체에 자유진보 성향의 사우디 언론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됨.

- 2003~2007년 영국으로 자발적인 망명

투르키 빈 파이살 알사우드 당시 주미 사우디 대사 보좌역 및 홍보 담당자로 근무 

- 2007년~2010년 사우디 내 가장 진보적인 매체가 된 알와딴 편집장으로 복귀. 사우디의 엄격한 이슬람 통치규정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잇달아 실어 해임.

- 2010~2016년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중도적인 매체를 지향하며 바레인을 본부로 하여 설립했던 알아랍 뉴스 채널 ([미디어] 알왈리드 왕자의 알아랍 뉴스 채널, 올 연말 공식 개국한다! 참조)의 국장으로 지명되었지만, 알아랍 뉴스 채널은 반정부 인사와 인터뷰를 문제삼은 바레인 당국에 의해 개국한지 24시간도 안되어 강제 폐국됨.

MBC, BBC, 알자지라, 두바이TV의 사우디 정치 해설자로 출연

알아라비야에 정기적으로 오피니언 게재 (2012~2016년)

- 2016년 트럼프 미대통령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사우디 당국에 의해 방송 출연 및 트윗 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짐.

- 2017년 미국으로 자발적인 망명을 떠나 9월부터 워싱턴 포스트에 카타르 고립사태, 예멘 내전, 캐나다와의 외교분쟁, 언론탄압 등을 주제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사우디 정부를 비판하는 칼럼을 잇달아 기고 (링크)

- 2018년 10월 2일 주이스탄불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간 이후 행방불명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눈에 띕니다. 

1) 사우디 왕가와 오사마 빈 라덴과의 은밀한 거래관계를 아는 유일한 비 왕실인사, 그리고 자발적인 망명을 택했을 때도 주미 사우디 대사를 위해 일했을 정도로 사우드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친정부 성향 인사였지만, 두번째로 고국을 떠난 2017년 이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사우디 정부를 공개 비판하는 저격수로 변신.

2) 두 차례에 걸친 알와딴 편집장직 해임, 자신이 국장으로 개국했던 알아랍 뉴스 채널의 강제 폐국 사건에서 볼 수 있듯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사우디인들과 달리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지언정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힌 언론인


그의 일관된 행적을 볼 때 2016년 이후 친정부적인 시각에서 반정부적인 시각으로 급변한 사우디 정부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가 변했다기 보다는, 그가 인싸이더로, 때로는 정부의 정책을 견제하는 발언을 하면서 수십년간 봉사해왔던 자신의 나라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급부상과 함께 급변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지금의 사우디 정부는 그간 비난받아왔던 각종 관습을 철폐하는 잇따른 개혁정책으로 세계적인 화제를 끌어모으고 있지만, 그 이면에 숨겨있던 암연 역시 더욱 짙어지고 있을 뿐이니까요. 사우디 정부를 향한 그의 시각은 왜 바뀌게 되었을까요?


그의 이력에서 볼때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우디 정부는 이슬람 세력이 어느정도 기반을 가진채 건설적인 비판과 견제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사우디 내에 그나마 있었던 종교적, 정치적 견제세력은 상대적으로 지지세력이 많지 않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급격한 권력강화 과정에서 유명무실하게 되었지만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체제에서 붕괴된 사우디 국가 시스템의 세력 균형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제 이전 사우디의 국가 시스템은 사회적으로는 사우드 씨족과 종교세력 간의 갈등과 균형, 정치적으로는 사우디 군부 내 세력 균형에 의해 움직여 왔습니다.


1. 사우드 씨족과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과 균형

이슬람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사우디는 가장 원리주의적이라는 와하비즘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양대 성지 수호자"라는 별칭에서 볼 수 있듯이 최고 통치자인 국왕 및 사우드 씨족이 종교인이 아닌 정치인입니다. 그럼에도 와하비즘이 사우디의 통치이념이 된 것은 애시당초 18세기의 혼란기에 아라비아 반도 통일에 관심이 많았던 무함마드 빈 사우드와 초심을 잃은 종교세력에 불만이 있던 와하비스트인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이 혼인으로 결탁하여 제1사우디 국가를 세웠던 것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의 역사는 사우드 씨족과 와하비스트 간 애증과 경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역사] 사우디는 어떻게 건국되었을까? 사우드 씨족의 오랜 투쟁기,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참조) 사우드 가문보다 와하비스트들의 세력이 보다 강했던 제1사우디 국가의 경우 그 배타적인 종교적 테러행위가 빌미가 되어 멸망을 자초했던 것처럼, 사우드 가문은 종교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경우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이 위협받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사우디 왕국을 세운 압둘아지즈 국왕이 통일전쟁의 일등 공신임을 앞세워 영향력을 높여가던 민병조직 이크완을 궤멸시키고 잔존 세력들을 친위조직인 국가방위군으로 흡수했던 것처럼 사우드 왕가의 통치자들은 종교 지도자나 종교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을 통해 종교 세력이 지나치게 정치 세력화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견제해 왔었습니다. 이슬람 공화국임을 내세우고 있는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최고 종교 지도자가 대통령보다 더욱 높은 자리에 있는 것과 달리 사우디 내 최고 성직자인 그랜드 무프티는 자리 자체가 1953년 처음 도입되어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후손인 알 앗셰이크 가문 출신 중에서 국왕이 임명하고, 한동안 (1969~1993년)은 그 자리마저 비워놨을 정도로 말이죠.


1) 불과 몇 년전까지 강력했지만 지금은 쇠약해진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 약화

1932년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국 이후 종교적으로는 보다 관용적이며 온건했던 사우디 사회는 1979년 말 국부 압둘아지즈 국왕이 궤멸시켰던 이크완의 후손들이 시아파에서 제창하는 메흐디 재림을 앞세워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을 일으키면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그동안 사우드 씨족에 밀려 움추려 있던 종교세력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강경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우드 씨족은 이슬람 종주국임을 자임하기에는 종교적인 뿌리가 없는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양대 성지 수호자"를 자임하면서도 정작 허술하게 그랜드 모스크 점거를 허용하면서 체면을 구길대로 구겼기에 이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 나야했을 국왕 이하 주요 왕자들의 처벌을 면하는 조건으로 종교 지도자들과 딜을 할 수 밖에 없었을테니까요. 


1980년대 이후 와하비즘에 입각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종교경찰로 대변되는 종교세력에 눌려있던 사우디 정부는 2003년 5월을 계기로 성직자들에 대한 통제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헐리우드 영화 킹덤의 모티브가 되었던 5월 12일 리야드 컴파운드 연쇄 폭탄테러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영화] The Kingdom, 왕국에서 피의 악순환을 이야기하다... 참조)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 당시 국가방위군 총사령관으로 사건 종결 후에도 경질은 면했지만 망신을 톡톡히 당한 바 있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당시 왕세제 겸 실질적인 사우디 통치자가 폭탄테러 사건 이후 사우디 내에서 과격한 원리주의자들을 궤멸시킬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 당시에는 자신이 이들과의 전쟁에 나설 입장이 아니었지만, 2003년에는 다수파인 수다이리 세븐 이복형제들을 제끼고 다음 국왕 자리를 예약해 둔 왕세제였으니 말이죠. 이 선언의 일환으로 사우디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명분을 앞세워 친정부 성향의 성직자 기관을 세우고 과격주의 성직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하면서 사우디 내 성직자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위축시켜 왔습니다. ([사회] 사우디, 2003년 이후 이슬람 과격주의 성직자 3,500명 해고해! 참조) 베이비붐 세대로 급증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층들이 어른 세대들과 달리 종교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성향을 띄게 된 것도 이들의 영향력을 위축시키려는 사우드 왕가에게는 그야말로 호재였던 셈이죠. 이는 압둘라 국왕이 국왕 취임 후 권력기반을 닦은 2010년 이후 사우디 정부는 안하무인으로 활동했던 종교 경찰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나가고 ([사회] 사우디 종교경찰이 과격 원리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유! 참조) 그랜드 무프티를 위시한 고위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과 개혁주의자들의 반발 속에서도 나름 충분한 논의과정을 거쳐 느리지만 온건한 개혁정책을 펼쳐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현재의 사우디에선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이라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개혁정책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정책에 수십년 동안 큰 목소리를 내던 종교 지도자들은 그전과는 달리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2) 일련의 이슬람 종교, 사회운동에 대한 강경한 탄압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의 촉매제가 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걸프지역, 특히 사우디와 UAE 통치자들에게는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첫째, 이슬람으로 결집한 민중세력들의 혁명으로 세속정권을 몰락시키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다는 점, 그리고 둘째, 이란 이슬람 혁명의 영향을 받은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자신들에게도 이란의 팔레비 왕조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통치 정당성 면에 있어 이슬람 종주국을 자처하면서도 최고 지도자가 성직자가 아닌 세속주의 통치자라는 아킬레스 건을 갖고 있는 사우디에서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사우드 왕가 자체가 원리주의자를 신봉하는 와하비스트들과의 결탁으로 힘을 키웠으니 말이죠. 


이란 이슬람 혁명에서 비롯된 이슬람 종교, 사회운동을 통한 정권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랍의 봄과 맞물려 사우디 정부가 무슬림 형제단을 극도로 위험한 단체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우디 역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예고되었지만, 정부의 통제정책 등으로 무산된 바 있으며 ([사회] 조용했던 사우디 "분노의 날", 군인들에게 불려들어갔던 사연 참조), 압둘라 국왕은 이에 감사한다며 대대적인 국민 회유책을 발표하기까지 했었죠 ( [사회] 압둘라 국왕, 약 150조원의 사회복지자금 운영계획 발표! 참조). 하지만, 아랍의 봄을 타고 무바라크 정권 몰락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무슬림 형제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한 무르시 정권의 탄생은 그 위기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막대한 외교적, 경제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알후씨 반군을 없애겠다며 예멘 내전에 뛰어들고 헤즈볼라의 위상이 강화된 레바논 내정 개입, 자신들이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무슬림 형제단 지원 등을 이유로 카타르 고립 사태를 이끌고 있는 것 ([분쟁] 카타르가 단교 사태 종식의 전제조건으로 사우디, UAE로부터 받은 청구서 내역 참조)은 사우디 내에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이슬람 사회운동의 영향력 확대를 잠재우기 위한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우려로 UAE 내에 국민투표와 같은 선거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할 수 없다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멘토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제의 통치관과 반정부 시민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운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세 나라가 무슬림 형제단 척결을 앞세워 더욱 각별해지는 계기가 된 바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주요 외교정책들은 자말 카쇼끄지가 워싱턴 포스트 논평을 통해 비판해 온 주요 이슈들이기도 합니다. 한때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했던 것으로 알려진 자말 카쇼끄지는 아랍의 봄 이후 본격적인 정치 세력화를 꾀했다가 위축된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동정심을 자신의 칼럼을 통해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러가지 유무형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형제단 지원을 빌미로 카타르 단교 사태를 주도하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예멘 알후씨 반군과의 전쟁과 사우디 정부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헤즈볼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진 레바논 내정에도 개입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움직임을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요.



2.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권력강화로 붕괴된 사우드 씨족 내 견제 구도

사우디 사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사우드 씨족과 이슬람 성직자들 간의 세력 균형 외에 또 하나의 축은 사우드 씨족 내의 세력 균형입니다. 사우드 씨족 내에서 왕위를 승계받기 위해 거쳐야 할 핵심 정부 조직은 독자적인 군사조직 국내안전보장국을 갖고 있는 내무부 (위에서 소개해드린 분노의 날에 사진찍으러 다니다 불려들어간 곳이 국내안전보장국이 아닐까 싶네요), 혹은 군부입니다. 살만 국왕 부임 전의 사우디는 3명의 왕자가 권력을 나누어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였습니다.


국방부- 고 술탄 빈 압둘아지즈 왕세제 및 만 빈 압둘아지즈 현 국왕 계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수다이리 세븐)

국가방위부- 고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전 국왕 계열/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 (전 국가방위부 장관) (소수파)

내무부 (국내안전보장국)- 고 나이프 빈 압둘아지즈 왕세제 계열/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 (전 왕세질) (수다이리 세븐)


사우드 군부의 삼각 구도는 종교 세력과의 세력 균형은 물론 사우드 왕가 내에서도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정국운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절묘한 균형추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소수파벌인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왕자가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사우디 국가방위부를 장악하고 그 자리를 지켜낸 덕분이었죠. ([정치] 압둘라 사우디 국왕과 그가 위상을 강화시킨 자신의 권력 기반, 사우디 국가방위부 참조) 압둘라 국왕이 온건한 개혁정책을 추진해왔던 것도 종교 세력은 물론이거니와 국방부와 내무부를 장악한 수다이리 세븐의 두 왕자들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압둘라 국왕이 견제 구도를 개편해보고자 자신의 측근을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시켰다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 주도로 결국 내쫓긴 바도 있었죠. 이 사건은 당시 위키피디아에도 소개가 되어있지 않았을 정도로 듣보잡 왕자 중 한 명이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가 제 블로그 포스팅에서 처음 등장하게 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정치] 압둘라 국왕, 칼리드 빈 반다르 국방차관을 지명 6주만에 전격 경질, 그리고 그 배경 참조)


압둘라 국왕파와의 왕위 계승전을 승리로 이끌며 살만 국왕의 취임과 더불어 사우디의 경제와 국방을 손아귀에 넣은 무함마드 빈 살만 부왕세자는 아버지 살만 국왕의 칙령을 통해 2017년 6월 내무부 내 국왕 직속의 독자적인 사정기관 설립을 발표한지 불과 4일만에 내무부 장관을 겸임했던 차기 왕위 계승자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을 실각시키고 자신이 왕세자로 오른 뒤, 11월에는 숙청의 밤을 통해 눈엣가시였던 국가방위부 장관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마저 비리혐의로 전격 체포하면서 사우디 역사상 최초로 어느 국왕도 이루지 못했던 3대 군부 조직을 장악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왕자, 기업인 등 유명 인사들의 잇단 체포로 인한 혼란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반대 여론을 누르기 위한 목적이 담겨있는 국왕 및 왕세자 모욕죄 처벌안을 추가한 테러방지법을 발표한 것은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힘을 실어준 신의 한 수였습니다. ([정치] 대규모 숙청작업으로 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권력투쟁기 참조)



조국을 떠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저격수가 된 자말 카쇼끄지의 비극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에 의해 내무부를 이끌었던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이 실각한 사건은 자말 카쇼끄지로 하여금 사우디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젊은 왕세자의 손에 사정기관을 포함한 내무부 일체가 넘어갔고, 그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씩 체포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에게는 너무나도 뻔히 보였을테니까요. 만약 그가 사우디를 떠나 미국으로 가지 않았었다면, 우리는 지난해 11월 숙청의 밤에 체포된 유명인사들 중 한 명으로 자말 카쇼끄지를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을 견제할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불과 몇 년만에 잠재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내부적으로는 정부 주도의 성직자 조직과 내무부의 사정기관을 앞세워 자신에게 반발하는 세력들을 지속적으로 체포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이를 감추려는 듯 사우디 국민은 물론 사우디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외국 언론들의 관심을 모으는 화려한 개혁정책들을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그간 금기시해왔던 여성운전 허용, 경기장 출입 허용조치 등에서 볼 수 있듯 평소의 사우디였다면 몇 년에 걸쳐 사회적인 논의를 거친 후에나 겨우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정책들이 비전 2030, 네옴 발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측근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사우디 내부에서 아무런 중간 토의과정도 없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 의해 극적으로 발표되는 방식으로 말이죠.  


대외적으로는 크게 주목받지 않은 상황에서 사우디 내부의 자체적인 견제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사정기관을 앞세워 정작 잡아들여야 할 극단주의자들은 잡지 않으면서 애먼 비판세력을 잠재운 채 견제세력 없이 추진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 의한 일방적인 개혁정책 추진과 자신이 지지하는 무슬림 형제단(+알후씨 반군+헤즈볼라 등등....)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큰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면서 무리수를 두는 외교정책에 대한 반발은 수십년 동안 친정부 언론인이자 정보원 활동을 했던 그를 불과 몇 년만에 대표적인 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언론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사우디와 달리 반 무슬림 형제단 및 이슬람 세력을 모토로 예멘, 레바논, 카타르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외교 및 국방 정책에서는 뜻한 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통하지 않는 미국으로 넘어가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자말 카쇼끄지가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행방불명 며칠 전 블룸버그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는 자말 카쇼끄지처럼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건설적인 비판은 환영한다고 밝히기까지 했지만, 그가 사우디에 있었다면 무슨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잡아넣고 싶었을테니까요...


이스탄불에서 사라지기 3일전 영국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BBC와 가진 비공식 대화가 자말 카쇼끄지가 행방불명 되기 전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인터뷰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당초 비방용 대화였지만 그가 행방불명된 후 BBC에 의해 녹취록이 전격 공개된 이 인터뷰 (Jamal Khashoggi: 'People who get arrested are not even dissidents' 참조)에서 자말 카쇼끄지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사우디 정부가 심지어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마저 잡아들이고 있다며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론탄압을 계속하고 있는 그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현재의 조국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3일 뒤 자말 카쇼끄지는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영사관으로 들어간 뒤 행방불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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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C/GU/사우디2017. 10. 25.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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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메가시티 네옴 홈페이지 메인. 링크를 누르면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살만 국왕 체제의 사우디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동안 개발하지 않았던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홍해 연안, 특히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대인 홍해 북서부 지역 개발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홍해 대개발의 시작을 알린 살만 대교 발표, 그리고 티란 섬과 사나피르 섬 복속

그 서막을 알린건 지난해 4월 살만 사우디 국왕의 이집트 순방 도중 약 40억달러를 사우디가 투자하여 아카바만을 가로질러 사우디의 북서단에 위치한 라스 알셰이크 후마이드와 이집트의 관광명소 샤름 엘셰이크를 연결하는 킹 살만 대교를 짓겠다고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사우디와 이집트를 육로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는 1988년 이래 양국간에 오랜 논의를 거쳤던 묵힐대로 묵혀둔 대형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최대 수심 700미터에 달하는 아카바만을 가로지는데 있어 예상되는 여러가지 기술적 난제, 도로 건설 및 통행량 증대로 예견되는 환경파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관문이자 아프리카 대륙의 무슬림들에게 또 하나의 성지순례 환경을 제공할 수 있기에 사우디 정부가 공사자금은 10년안에 회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칠 정도로 양국에 막대한 통행료 수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안건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통행량이 많은 새로운 도로의 개통은 치안이 불안한 변경지역의 치안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기대할 수도 있구요. 시나이 반도에서 각종 테러사건이 종종 발생한다는 소식 들으셨죠?


하지만, 양국의 이익이 보장될 것만 같은 이 프로젝트가 오랜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던 이유는 다리를 짓는 것이 당사자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탓도 있었습니다. 두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아카바만을 통해 인도양에 접근할 수 있는 이웃 국가 이스라엘과 요르단, 특히 이스라엘의 반발이 컸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005년에는 착공 직전까지 갔다가 이스라엘이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이집트를 압박하면서 무바라크 정권이 전격적으로 프로젝트 진행을 취소시킨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압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8년 전 아랍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국간에 체결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 조항 중에 이스라엘이 아카바만과 티란 해협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삽입되어 있었고, 티란섬이 이집트의 영토였기에 티란 해협의 권리를 완벽히 갖고 있었던 이집트가 거부하고 나서는 것을 당시의 사우디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각주:1] 2005년 당시의 사우디는 왕실 내 최다 세력인 수다이리 세븐의 일원인 파흐드 국왕의 서거와 왕실 내 소수파 압둘라 국왕이 즉위가 맞물린 정권 교체기였기에 포기하려는 이집트를 뜯어말려 프로젝트를 진행시킬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무바라크 정권 시절에 포기했던 프로젝트는 무르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부활할 기미가 보였지만 민중 봉기에서 시작된 군부 쿠데타로 엘 시시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면서 또다시 유야무야되는 듯 했다가 살만 국왕의 이집트 방문과 함께 전격적으로 부활하게 된 셈입니다. 이집트 정부는 킹 살만 대교 건설을 발표한지 며칠 만에 1950년 이래로 이집트의 영해에 있었던 티란 섬과 사나피르 섬을 사우디로 복속시킨다고 발표하며 사우디의 전폭적인 지원에 보은에 나서 이집트 여론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2005년만 해도 티란 해협 통행의 자유를 빌미삼아 이집트를 압박했던 이스라엘은 이에 반대할 것이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집트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하면서 사우디와 이집트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킹 살만 대교 건설 프로젝트 진행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짓는데 3년이 걸릴 것이라던 살만 대교의 구체적인 계획이 여전히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함정....)



사우디의 변화를 예고한 홍해 관광 프로젝트

살만 대교 건설 합의 발표로부터 1년 3개월이 지난 2017년 7월 31일 불과 몇 년전만 해도 아버지 살만 왕세제의 책사였을 뿐 인지도가 없었던 무수히 많은 사우디 왕자들 중 한 명에서 노회한 사우디 왕실 내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을 헤쳐 나가며 불과 몇 년 사이에 차기 왕위 계승자이자 사우디의 개혁을 이끌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하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비전 2030 실행을 위한 핵심 요소 중 하나인 관광산업 개발을 겸한 홍해 관광 프로젝트를 발표하게 됩니다.



홍해와 접한 사우디 서부 지역에서도 아직 개발되지 않은 50여 개의 섬이 몰려 있는 우믈라즈 (Umlaj)와 알와즈흐 (Al-Wajh) 일대를 개발하고 인근에 있는 사우디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인 마다인 살레와 그 길목에 자리잡은 현무암 화산지역 하르라트 쿠나이르 등을 연계시키는 패키지 관광 프로젝트입니다. ([알 울라] 멀고도 헤맸던 알 울라로 가는 길, 그리고 얼떨결에 발견한... 참조) 사우디 남서부 지잔 지역에도 파라산섬 등을 위시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섬들이 있지만, 알후씨 반군과 여전히 대치 중인 지역의 특성상 관광객을 유치하기엔 한계가 있기에 비교적 안전하고 주변에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명소가 많이 있는 타북 지역을 프로젝트 지역으로 지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잔] 사우디 남서부에 위치한 사우디에서 가장 큰 파라산섬 (1) 참조)



2019년 착공, 2022년 1단계 완공, 2035년 연간 방문객 100만명 유치를 목표로 한다는 이 프로젝트가 더욱 주목을 받게된 건 보다많은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그간 사우디 사회 내에서 종교적인, 또는 사회 관습적인 이유로 금기시해왔던 비키니 착용과 여성 운전허용의 봉인을 풀어버리는 관광특구가 될 것임을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의 넓은 땅덩어리를 공권력이 다 커버하지는 못하고 차량이 없으면 살기 불가능한 지역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보니 가정형편 상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양해 속에 40년 동안 단 한번도 걸리지 않고 몰래 운전한 여성의 사연과 여성운전 불허에 대놓고 저항하다 구속되는 여성들의 사연이 공존하는 사우디 내에 정부가 인정하는 여성운전 허용구역이 생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화제를 모을 수 밖에 없던 소식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음주가 허용될지는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아 그 이상의 파격을 기대해도 될 지는 알 수 없지만요...


홍해 관광 프로젝트를 통해 발표된 특구 내 여성운전 허용은 결국 두 달 뒤인 9월 26일 내년 이드 알피뜨르가 끝나는 2018년 6월 24일 경부터 사우디 전역에서 여성 운전 허용이라는 전격적인 살만 국왕의 역사적인 칙령의 예고편이 된 셈이었습니다. ([사회] 살만 국왕, 사우디 내 여성들의 운전을 허용하는 역사적인 칙령 전격 발표! 참조)    


1년 3개월 사이에 발표된 두 개의 프로젝트를 보면서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젯다에서 살만 대교가 들어설 예정지인 라스 알셰이크 후마이드까지 최단 거리가 약 1,000km, 리야드에서는 약 1,600km로 멀어 사람들의 접근이 그다지 쉽지 않은 외진 구역에 프로젝트를 여는데 변경 지역인데다 그 일대엔 구글 지도를 줌아웃해서 봐도 이름이 나올 정도의 도시가 없으니 뭔가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느껴진달까요... 치안을 감당할 수 있는 군사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홍해 관광 프로젝트의 시작점인 우믈라즈에서 가까운 얀부는 사우디 서부의 대표적인 중화학도시.




홍해 북서부 개발의 화룡점정, 대규모 신도시 프로젝트 네옴 (NEOM).

이러한 허전함을 의식한 듯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10월 24일 자신이 주최한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 컨퍼런스를 통해 사우디 내의 기존 규제와 제약에 벗어난 미래형 주거·사업용 신도시 '네옴'(NEOM)을 건설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클라우스 클라인펜트 전 지멘스, 알코아 회장이 CEO를 맡아 서울 면적의 44배에 달하는 2만 6500 km2의 부지 위에 5천억달러를 투자하여 친환경 재생 에너지로 움직히는 미래형 도시를 표방한다는 국적불명의 이름 네옴 (NEOM)은 라틴어로 New를 의미하는 NEO와 아랍어로 미래를 의미하는 Mustaqbal을 조합하여 도시가 표방하고 있는 슬로건인 "새로운 미래"를 의미합니다. 아랍어 표기 نيوم은 같은 의미를 지닌 نيو مستقبل에서 그대로 따와 축약했습니다.


(CEO 계약서에 서명하고 악수를 나누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클라우스 클라인펠트 네옴 프로젝트 CEO)


공교롭게도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고 있는 두 나라, 살만 대교를 통해 이집트와 바로 국토가 맞닿아 있는 요르단이 만나는 사우디 북서부 끝에 위치하게 되는 네옴은 국교가 개선되면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카바만을 통해 직접, 그리고 무비자 통행이 가능한 시나이 반도를 우회하여 이스라엘과 만나게 되는 접점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살만 대교 발표 과정에서 프로젝트 자체를 보류시키게 만든 적도 있는 이스라엘의 대처를 감안했을 때 단순한 다리 건설이 아니라 소외받았던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메가시티 건설에도 대놓고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음에도 사우디와 이스라엘간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우디와 이집트, 그리고 이스라엘 3국에게는 무슬림 형제단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을 공통의 적으로 두고 있는데다, 공교롭게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가 미정부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온 무함마드 빈 나이프 전 왕세질을 제치고 왕세자가 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여전히 적대적인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모종의 거래설, 네옴 발표 며칠전 AFP를 통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이스라엘 극비방문설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네옴 발표는 자신의 이스라엘 극비방문설을 한방에 덮어버리긴 했지만요.


(사우디 메가시티 네옴 위치)


아시아 대륙과 아카바만을 통해 두 개 대륙 세 나라와 연결되는 네옴은 전세계 교역량의 10%가 지나는 홍해의 관문에다 전세계 인구의 70%가 사는 국가들을 여덣 시간 내로 오갈 수 있는 중간 기착지라는 위치적인 장점 외에도 태양 에너지와 풍력 에너지로 움직이는 도시를 만들겠다고 선언할 수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우디를 포함한 다른 걸프 지역 대비 평균 온도가 10도 정도 낮아 살기에 적절한 온도, 홍해와 아카바만, 그리고 한겨울에는 폭설도 종종 내리는 2580미터의 최고봉 자발 알라우즈를 위시한 사우디 북서부 산악지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초속 10.3미터의 이상적인 평균 속도를 자랑하는 바람, 그리고 제곱미터 당 20MJ의 태양 자원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두바이가 제공할 수 없는 천혜의 장점입니다. ([타북] 사우디에도 눈이??? 폭설내린 사우디 북부 타북 지역의 풍경... 참조) 투자 컨퍼런스에 참석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사우디 영토의 3%만으로도 전세계 태양 에너지의 50%를 공급할 수 있다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했죠. 


(눈내린 자발 알라우즈 일대 풍경)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내의 기존 규제와 제약에 벗어난 미래형 주거·사업용 신도시를 표방한 네옴의 발표와 더불어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수년 내에 와하비즘으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극단주의 종교관에서 탈피하여 1979년 이전 다른 나라와 종교에 개방적이었던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되돌아가겠다고 선언하여 더욱 화제를 모았습니다. 금기시되어 온 여성 운전을 허용하는 것도 이러한 계획의 일환이기도 합니다만..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보수꼴통적인 극단주의 종교관으로 무장한 사우디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언급한대로 두 가지 대형사건으로 시작과 끝을 장식한 1979년 이후 역변한 사회상입니다. 그 시작은 1978년 1월에 시작되어 세속적인 팔레비 샤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1979년 2월에 마무리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었으며, 그 마무리는 1979년 11~12월 사이 2주간 사우디 건국의 일등공신이자 원리주의 민병대 세력 이크완의 후손인 주하이만 알오타이비가 주동하여 벌어졌던 메카 그랜드 모스크 사건이 그 것입니다. (이크완에 대해서는 [역사] 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의 또다른 주인공, 베두윈들의 종교적 민병대 이크완 참조)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두 사건이 관련이 있는 건 온건해지는(이라고 쓰고 방탕해 보이는...이라고 읽는) 사우디 사회에 환멸을 느낀 주하이만 알오타이비가 종교를 앞세워 세속적인 정권을 무너뜨린 이란 이슬람 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시아파가 보다 중요시하게 여기는 마흐디 재림 사상을 접목시켜 자신의 처남인 무함마드 압둘라 알까흐따니가 사도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이자 마흐디로 (타락해가고 있는 세상에) 심판의 날을 앞두고 재림했다고 선동하면서 2주간 그랜드 모스크를 점거했다는 점이죠. 


(지금까지의 사우디가 피처폰이었다면, 앞으로의 사우디는 스마트폰이 되어야 한다며 변화를 역설하다.)


양대 성지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세속적인 사우디 왕가로서는 그야말로 개망신당한 사건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와하비스트들이 원하는 극단적인 원리주의 사회로 역변했던 것입니다. 원리주의 종교 세력 와하비스트들과 세속적인 정치 세력 사우드 씨족이 결혼이라는 형태로 결합해서 세워진 역사를 가진 하이브리드 체제의 사우디인만큼 두 세력간의 균형을 심각하게 깨뜨리는 극단적인 사회변화를 이미 겪었기에 사우디 정부로서는 원흉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는 이란에 대해서만큼은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마무리하며....

미래 신도시를 컨셉으로 잡은 네옴을 통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는 그야말로 화려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고 (너무 길어서 링크로 대체...), 변해야 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마냥 장미빛 전개가 이뤄지기는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첫번째 불안요소는 대규모 메가시티 프로젝트 성공 경험이 없다는 점으로 그 불안요소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바로 압둘라 전 국왕이 내세웠던 신도시 프로젝트 라비그 인근의 킹 압둘라 경제도시 (KAEC)입니다. ([킹 압둘라 경제도시] 개요 & [킹 압둘라 경제도시] 현장 방문기 참조)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세계 금융위기가 찾아오는 등 장애물도 있었지만, 여전히 진행 중임에도 당초 계획했던 장및빛 목표를 달성하는데는 실패했으니까요. 대규모 신도시 개발을 성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찾아온 저유가 시대는 예산 삭감으로 인한 각종 프로젝트 축소와 기성 지급 지연으로 인해 빈라덴 그룹과 사우디 오거 같은 초대형 건설 그룹의 부도를 초래한 바 있습니다.


(2007년 킹 압둘라 경제도시 사무소에서 직접 본 조감도.)


두번째 불안요소는 산업 다각화를 위해 외국인 투자자를 반기면서도 역으로 니따까 강화, 외국인 고용세 부가 및 인상, 워크비자 시한 단축 및 각종 비용 인상 등 투자를 망설이게 하는 각종 제약이 나날이 강해지는 이중적인 사우디 정부의 경제정책에 있습니다. 사우디 총인구의 2/3 이상을 자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인구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정책이긴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민간 부문 고용 인구의 50%가 저임금 미숙련 노동자로 채우는 건설업에 의존하고 있는 산업구조는 정부의 이중적인 경제정책이 효율적으로 작용하는데는 한계가 있기에 아무리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특구가 될 것임을 천명했지만, 필요한 인력을 어떻게 유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을 남길 수 밖에 없죠.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한다며 사우디 일반 투자청 (SAGIA)을 이용하여 각종 편의제공을 약속했지만, 앞서 언급한 여러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기대만큼의 외국인 투자유치를 이루지 못하기도 했었죠. 살만 국왕 부임 이후 해외를 순방하며 직접 홍보하고 외국 업체에게는 그동안 내주지 않았던 사업 라이센스를 발급해주기 시작했지만요.


본인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Mr. Everything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왕실 내 권력투쟁에서 이룬 승리를 밑천삼아 사우디인의 70%를 차지하는 자신보다 어린 국민들을 이끌고 나라를 일신하는 주인공이 될지, 야심찬 계획이 공염불에 그치고 마는 천둥벌거숭이가 될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1. http://www.ibiblio.org/sullivan/docs/CampDavidAccords.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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