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UAE와 카타르는 다시 육로로 연결될 수 있을까? UAE의 웨스트 링크 (West Link) 프로젝트로 보는 UAE-사우디 국경분쟁사

지난 4월 14일, 중동지역 비즈니스 인텔리전스를 표방하는 경제지 미드 (MEED/ Middle East Economic Digest)는 UAE가 사우디 아라비아를 우회하여 카타르로 이어지는 해상 교량 (Causeway) 건설 프로젝트의 입찰 절차를 개시했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보도합니다. UAE에서 추진한다는 프로젝트지만, 정작 UAE 미디어 보다 카타르 미디어에서 더욱 관심 있게 주목하고 있는 소식입니다.
육로로 UAE에서 카타르를 가려면?
현재 육로를 이용해 UAE에서 카타르로 가려면 약 140km 구간의 사우디 영토를 반드시 거쳐야만 합니다.

아부다비 서쪽 끝에 위치한 알구와이파트 검문소를 지나 국경을 넘어 사우디의 알바싸 검문소를 거쳐 북서쪽으로 쭈욱 올라간 뒤,

카타르와 육로로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국경지역인 사우디의 살와 검문소를 통과해 국경을 넘어 카타르의 아부 사마라 검문소를 거쳐 카타르로 입국하는 루트입니다.

현재의 루트를 이용하면 UAE와 사우디 국경에서 도하까지 이동거리는 대략 240km인데, 사우디가 중간에 다른 루트를 만들지 않고 굳이 살와 국경까지 올라오게 만드는 바람에 절반이 넘는 140km 정도 구간을 사우디 영토 내에서 뺑이쳐야 한다는 점이 UAE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다시 준비하게 된 이유입니다.

UAE의 웨스트 링크 프로젝트 (West Link Project)?
MEED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UAE의 에티하드 레일 (Etihad Rail)이 주관하고 있는 웨스트 링크 프로젝트는 UAE와 카타르를 바로 연결하는 왕복 4차선 해상 교량을 포함한 약 40km 길이의 도로 연결망을 구성하는 프로젝트로 지난 2024년 초 프로젝트의 개념 설계와 사회적, 경제적, 사업적 타당성 조사를 시작했으며, 국내외 여러 업체들이 지난 4월 4일 조달 초기 단계부터 공사 방법론과 설계 제안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 조기 시공사 참여 (Early Contractor Involvement/ ECI) 제안서를 이미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관사인 에티하드 레일은 이번 프로젝트가 해상에 걸쳐서 진행되기 때문에 다양한 공법, 설계 제안 및 예산 견적을 받기 위해 ECI 모델을 선택했다는군요.
웨스트 링크 (West Link)라는 프로젝트 이름은 아무래도 1968~1971년 사이 UAE 연합 구성에 참여했다가 결국 이탈한 아홉 토후국 (현재의 UAE 일곱 토후국, 카타르, 바레인) 중 하나인 카타르가 UAE의 서쪽에 위치해 있고 바로 연결되지 않았던 길을 연결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MEED가 공개한 웨스트 링크 프로젝트의 루트에 나오는 지명이 되게 생소해 지도를 찾아보니 상당히 괴랄합니다.
사우디를 거치지 않고 양국을 오가기 위해 짓겠다는 왕복 4차선의 40km 구간은 UAE의 서쪽 끝에 위치한 라스 구마이스(Ras Ghumais) 인근에서 시작해 바다를 가로질러 알갓파이 섬 (Alqaffay Island)을 거쳐 마카십 섬(Makasib Island)까지 이어지는 해상 교량이고, 마카십 섬의 페리 터미널에서 페리를 이용해 카타르로 오가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사우디를 우회하지 않겠다는 프로젝트가 최단 루트가 아닌, 바다로 우회해서 육로와 수로를 이용해 가야만 한다고?

UAE가 이런 괴랄한 루트를 검토하게 된 이유는 바로 UAE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사우디와의 국경문제 때문입니다. UAE와 오만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동부 지역의 경우 두바이, 샤르자, 푸자이라 등 UAE 내 개별 토후국과 오만이 얽혀 정말 오만 영토 아니면 모르고 지나치기 딱 좋은 월경지와 위요지가 뒤섞인 난해한 국경으로 유명해도, 정작 이해 당사자들 간의 합의로 인해 국경 분쟁이 더 이상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UAE와 사우디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부와 서부지역 국경은 (UAE 관점에선) 사우디의 양아치 짓 때문에 여전히 양국 간에 완벽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보니 UAE가 카타르와 바로 연결되기 위해 무려 20여 년 만에 다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이 웨스트 링크 프로젝트의 계획 루트가 괴랄한 것과 더불어 실현 가능성 여부도 사실 사우디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부라이미 분쟁 (Buraimi dispute/ 1952년 1월 28일~1955년 10월 25일)- 양국간 국경 분쟁의 서막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사막과 산이 많은 사우디, UAE, 오만의 국경지역을 획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휑하거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국경선을 긋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죠. 게다가 요즘처럼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시대가 아니다 보니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가 어디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소속이 정해지곤 했습니다. 서부 헤자즈 지역을 손에 넣으며 건국을 선포한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를 수출하게 되면서 미국과 영국의 정유회사와 함께 아라비아 번도 내 잠재적인 매장지를 찾아 엠티쿼터 너머 동부지역, 특히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던 부라이미 오아시스 일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영향 하에 있는 알 부 샤미스 (Al Bu Shamis), 나임 (Na'im)과 같은 씨족들이 이주하여 거주하고 있으니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죠.

이러한 와중에 1952년 사우디의 투르키 빈 압둘라 알오타이샨이 이끄는 소규모의 병력이 우호적인 씨족 세력과 함께 부라이미 오아시스에 있는 하마사 마을을 점령하면서 아부다비와 사우디 간의 부라이미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아부다비를 통치하던 형 셰이크 샤크부트의 대리인으로 고향 알아인을 통치하고 있던 셰이크 자이드는 사우디의 영토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사우디 측으로부터 아람코 (Aramco)가 석유 탐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약 3천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부할 수 없는 뇌물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분쟁은 확대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국지전 속에 양국간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셰이크 자이드와 그의 형제 셰이크 핫자는 1955년 9월 제네바에서 열린 부라이미 중재 재판에 참석해 위원들 앞에서 증언했으며, 사우디의 뇌물 제공 의혹이 제기되면서 중재 재판이 중단되었고, 결국 영국은 영국군 장교가 지휘하고 지역 유목민으로 구성된 오늘날 UAE 연합군의 전신인 트루셜 오만 레비스 (Trucial Oman Levies)라는 지역 군대로 부라이미 오아시스를 침공하여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사우디 군을 철수시키고, 부라이미 오아시스를 재탈환하는 것으로 분쟁은 마무리됩니다. 영국은 알아인을 아부다비에, 부라이미 일대를 오만에게 나누어주면서 부라이미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한 UAE와 오만의 국경이 정리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근처에서 유정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분쟁이 더 확산되지 않을 수 있었죠.

실제로 아부다비에서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정이 발견된 것은 3년 뒤인 1958년 아부다비 본토에서 약 160km 떨어진 페르시아 만에 자리잡은 다스 섬 (Das Island)의 움 셰리프 유전지대 (Umm Sherif Oilfield)였거든요.

반면, 분쟁 당시 오랫동안 외교부 장관을 맡다가 아버지 이븐 사우드의 사후 왕세제 겸 총리에 지명되자마자 맡아야 했던 첫 분쟁에서 패배를 맛봐야만 했던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제에게는 이 패배가 아부다비에 대한 앙금으로 남게 됩니다. 영국의 참전으로 전쟁에서도 패한데다, 당시로서는 일개 부족장에게 거액의 뇌물을 안기려다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외교무대에서도 망신살을 톡톡히 당했을테니까요.

이렇게 끝나는 듯했던 양국의 국경 분쟁은 종료 후 13년 뒤인 1968년, 영국이 3년의 시한을 두고 160년 넘게 군사력으로 간접 지배해 온 아라비아 반도 동부 해안가의 작은 에미레이트들로부터 철수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반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국군이라는 뒷배를 잃은 아홉 토후국들이 사우디에 들어가는 대신 아부다비와 두바이 주도로 3년여간의 논의 끝에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으니까요.
연합국 협상에 이견이 있었던 바레인과 카타르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따로 국가 수립을 선포했고,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아즈만, 움 알꽈인, 푸자이라의 여섯 토후국은 연합국 구성에 합의하면서 마침내 UAE를 건국하게 됩니다.
UAE 건국 (Formation of UAE/ 1971년 12월 2일)

부라이미 분쟁의 패전을 굴욕으로 여기던 파이살 왕세제는 UAE 건국을 선포했을 당시에는 사우디의 3대 국왕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셰이크 자이드가 UAE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뭐.. 이런 기분이었겠죠...

영국군이 철군하면서 제대로 된 무장 병력도 없는 애덜이 나라를 세웠으니까요.
그리고 부라이미 분쟁의 굴욕을 잊지 않은 파이살 국왕은 자신이 받았던 굴욕감을 아부다비에 되돌려주기로 합니다. UAE의 건국 후에도 개별 토후국은 인정했지만, 국경 분쟁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아부다비가 이끄는 UAE라는 연합국과 그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인 셰이크 자이드를 인정해주지 않고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셰이크 자이드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을 타개해야만 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너머 이란의 위협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사우디마저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상황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국가의 미래와 운명이 언제든지 위협에 빠져들 수 있을 테니까요.
젯다 조약 (Treaty of Jeddah/ 1974년 8월 21일)- 꼼수로 완성한 파이살 국왕의 보복

2년 넘게 UAE를 국가로 인정해주지 않았던 파이살 국왕은 국경선을 정리하면 UAE를 국가로 인정해 주겠다며 조약 체결을 제안합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수록 불리한 UAE의 상황을 감안한 것이었고, 양국은 1974년 8월 젯다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파이살 국왕은 조약 체결과 동시에 UAE를 국가로 공식 인정하고, 정식 수교 관계를 맺었습니다........만?
파이살 국왕은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입장과 조약서를 검토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이 협상에 참여했던 UAE의 약점을 이용해 꼼수를 부렸습니다. 조약서 최종본을 작성할 때 구두로 합의했던 조건을 사우디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해 놓고도 협상 당사자인 UAE에겐 이를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고 은근슬쩍 처리해 버렸으니까요. 파이살 국왕 입장에선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줬던 UAE (특히 아부다비와 셰이크 자이드)를 국가로 인정해 주는 대가였겠지만...
영악할 대로 영악해진 지금의 UAE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지만, 당시에는 군사력 기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신생국으로 사우디에게 국가로 인정받고 싶어 했던 조바심과 조약서를 검토할 전문가 집단의 미비가 맞물려 UAE에겐 외교 참사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UAE는 최종 조약서가 구두로 합의한 조건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사우디로부터 1년 뒤에나 알게 되었다고 하죠. 실제 조약서가 세상에 공개된 것인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1995년.
사우디는 젯다 조약을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성해 놨기에 조약서를 정부차원에서 비준해서 합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반면, UAE는 협상한 내용과 조약서 최종본의 불일치를 이유로 50년 넘게 비준하지 않은 채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UAE 정부는 사우디의 꼼수로 작성된 젯다 조약으로 인해 사우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서부 일대에 상당 부분의 영토를 빼앗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빼앗긴 정도가 아니라 UAE에겐 큰 손실이었다는 거죠.

1. 사우디의 샤이바/자라라 유전지대 석유 개발권 독점

사우디는 남부지역 국경을 끌어올리면서 샤이바/자라라 유전지대를 사우디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유전지대의 20% 정도가 UAE의 영토 안에 있어 구두협상 당시에는 석유 수익의 일부를 면적에 따라 %로 나누어 UAE와 공유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정작 조약서 최종본에는 사우디가 석유개발권을 독점하는 것으로 바꿔놓았던 것입니다. 파이살 국왕은 결국 19년 전 맛봤던 부라이미 분쟁의 굴욕을 제대로 설욕한 셈이었죠. 정말 그곳에 대형 유전지대가 발견되었으니까요. 그 후 샤이바 유전지대 개장식에 UAE정부는 사실상 강탈당한 땅이었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GCC 국가 중 유일하게 불참했다고 하죠.

2. 사우디의 알후와이사트 섬/코르 두와이힌 복속

남쪽으로는 샤이바 유전지대를 확보한 사우디는 서쪽으로는 아부다비가 점유하고 있던 알후와이사트 섬을 복속합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육로로 직접 왕래할 수 있었던 길이 막히면서 UAE와 카타르를 오가려면 반드시 사우디를 거쳐야만 갈 수 있게 되었기에 훗날 UAE가 카타르로 직접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당초 사우디는 젯다 조약으로 복속했음에도 한동안 별도의 국경 검문소를 설치하지 않고 UAE와 카타르의 직접 왕래를 묵인해 주었지만, 1990년대 들어 UAE가 카타르를 가기 위해 만들어놓은 길을 끊어버리고 현재의 우회 루트를 만들었다고 하죠. 사우디는 젯다 조약 체결 당시 이와 같은 사실을 직접 당사자인 UAE는 물론, 간접 당사자인 카타르에게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두 나라는 눈 뜨고 코 베인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생긴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더욱 모호해진 해상 국경입니다. 사우디가 일방적으로 수정한 젯다 조약에서조차 해상 국경은 훗날 획정한다는 여지를 남겨두었을 정도였고, 이 해상 국경 문제가 UAE-카타르를 직접 연결하는 해상 교량 건설의 난이도를 터무니없이 높여 버리는 후폭풍을 낳게 됩니다.

맥없이 사우디에 눈 뜨고 코 베인 신생국의 굴욕을 맛본 UAE는 국가가 안정화되고 현대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국제사회에 젯다 조약의 부당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이로 인해 끊겨버린 카타르와의 연결로를 재건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UAE, 카타르와 양국을 연결하는 해상 교량 건설을 위한 공동회사 설립 발표 (2004년 12월 22일)
젯다 조약으로부터 30년 뒤인 2004년 12월 22일, GCC 정상회담 후 UAE와 카타르는 양국을 잇는 둑길 건설을 위한 공동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합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아부다비 국경지역인 실라 (alsila)에서 출발해 바다를 가로질러 도하 남단까지 연결하는 해상 교량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야심 찬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마는데...
첫째, 바다를 가로질러 300km가 넘는 해상교량을 건설하는 것에 대한 기술적인 난이도가 터무니없이 높았고 (사우디-바레인을 연결하는 교량의 거리는 불과 25km),
둘째, 이 일대를 복속하면서 알야사트 해상 보호구역까지 자신들의 영해라고 주장하는 사우디가 이 교량이 건설되면 자신들의 영해를 침범한다며 어깃장을 놨기 때문입니다. 양아치 짓이라도 한 육상 국경과 달리 해상 국경에 대해서는 구두로든 서류상으로든 얘기된 사항이 없음에도 말이죠.
사우디/UAE - 카타르 외교분쟁(2017년 6월~2021년 1월)
영국 군의 철군을 앞둔 상황에서 연합국 구성 협상에 참여했던 국가였고, 사우디에 의해 인지하기도 전에 끊긴 육로를 연결하기 위한 회사까지 설립했던 UAE와 카타르의 관계는 역내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사우디와 UAE를 자극하기 위한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던 카타르에 낚여 사우디와 함께 단교를 선언하면서 소원해지기 시작합니다.
- 2017.05.25 - [GCC&GU/GCC&GU] - [GCC] 셰이크 타밈의 연설로 3년 만에 재점화된 사우디&UAE-카타르 갈등!
- 2017.06.06 - [GCC&GU/GCC&GU] - [분쟁] 단교 선언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카타르 고립에 나선 사우디와 UAE!
- 2017.06.24 - [GCC&GU/GCC&GU] - [분쟁] 카타르가 단교 사태 종식의 전제조건으로 사우디, UAE로부터 받은 청구서 내역
카타르와의 분쟁 당시 사우디는 카타르를 아라비아 반도에서 떼어내어 육로로 연결된 국경이 없는 섬처럼 만들기 위한 살와 운하를 파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그나마 이 계획은 행동에 옮기기 전에 알울라 선언을 체결하면서 카타르와의 분쟁은 일단 종료됩니다. 도발했지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두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잃은 건 크게 없던 카타르였지만, 확실히 4년 여 간의 분쟁 종료 이후 사우디와 UAE에 대한 어그로를 많이 자제하고는 있죠.
그로부터 4년 뒤, UAE가 20년 전에 시도했다 실패했던 UAE와 카타르를 연결하는 해상 교량 구축 프로젝트를 해상에서 조차 사우디 국경에서 멀어지게끔 바다를 우회하는 아주 괴랄한 루트로 다시 꺼내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운명은 젯다 조약 재협상도, 해상 국경 획정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사우디가 이 시도를 두고 볼지, 아니면 또다시 어깃장을 놓을지에 따라 달려있긴 하지만요.